‘울산왜성’을 바라보는 눈 (上)
‘울산왜성’을 바라보는 눈 (上)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10.24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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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성공원, 바꿔 말해 ‘울산왜성(蔚山倭城)’이란 이름의 근린공원 서쪽 진입로에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동상을 세우려던 계획이 자라 모가지처럼 쏙 들어간 것이 언제쯤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다만 전국동시 지방선거가 치러지기 직전인 것 같다는 기억만 희미할 뿐이다. 본지와 울산MBC 취재진의 쓴소리를 귀담아들은 지자체의 장이 취소 결정을 바로 그 직후 내린 사실이 그런 짐작을 떠올리게 한다.

그 무렵 가토 기요마사 동상의 건립 목적은 딴 데 있지 않았다. 일본 관광객 유치에만 눈독이 올랐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자 반대 여론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어디 감히 쪽발이 두목 동상을 조명(朝明) 연합군을 지휘한 권율(權慄) 장군과 나란히 세우겠다는 말인가. 발상 자체가 고약하기 짝이 없다.” 송곳날 같은 반대론이었다.

울산왜성이 최근 다시 논란의 장으로 소환됐다. 지방선거가 반년도 더 남은 시점에 부름을 받은 것이다. ‘동북아 3국이 바라본 도산성 전투 학술대회’가 지난 20일 열린 곳은 중구청 2층 ‘중구컨벤션’. 여기서 ‘도산성(島山城)’이란 학성(鶴城) 또는 ‘울산왜성’의 옛 이름으로, 왜군이 울산읍성과 병영성의 성돌을 날라 진지를 쌓고 조명 연합군과 싸웠던 곳이다.

기조강연과 주제발표가 차례로 이어졌다. <울산왜성과 도산성 전투>란 제목의 기조강연은 임진혁 울산연구원 원장이 맡았다. 주제발표는 <조선(朝鮮)이 바라본 도산성 전투> <명(明)이 바라본 도산성 전투> <왜(倭)가 바라본 도산성 전투>의 세 갈래로 나뉘었다. 흥미로운 대결이 시작됐다. 기조강연자인 임진혁 원장과 <왜(일본)가 바라본 도산성 전투>를 들고나온 한삼건 울산대 명예교수의 엇갈린 시각이 흥미의 불씨를 지폈다.

임 원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육지전투가 벌어졌던 울산왜성을 조선, 명, 왜 3국의 관점에서 재조명해서 역사의 교훈을 배우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자고 했다. 그 나름의 구상도 덧붙였다. ‘울산왜성’과 조명 연합군 주둔지였던 그 건너편 ‘학성산’ 사이에 국립울산박물관을 지어 조·명·왜 3국의 자료들을 전시해 교육용으로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임 원장의 구상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서울 덕수궁 정문의 ‘수문장 교대식’을 먼저 떠올린 그는 박물관 광장에서 3국의 의장대가 정기적 퍼레이드를 펴도록 해서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자고 했다. 그렇게 하면 해외 관광객 특히 일본과 중국 관광객들에게 그들의 선조들이 이역만리 먼 이곳에서 왜 그리도 치열한 전쟁을 치렀는지 보고 경험할 것이고, 그리하면 울산 최대의 국제관광자원이 될 것이 틀림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한삼건 교수의 견해는 전혀 달랐다. 한 교수는 임 원장의 지론에 일격을 가하는 듯 지론을 펴나갔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붙여진 적이 없던 ‘왜성’이라는 명칭을 1997년 이후 사용하면서 울산왜성이 정유재란 당시 우리 조상이 피 흘려 싸운 우리의 전적지가 아니라 지금 현재도 일본인의 조상을 기리는 장소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한 교수의 반론이었다.

한 교수는 “일본에 의한 한반도 식민지지배가 본격화되면서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을 바탕으로 한 조선인 교화 등을 이유로 가토 기요마사와 같은 장수를 소환해 국민정신 교육 자료로 활용할 사회적 필요성이 높아졌다”고 강조했다. 또 이에 따라 일본이 1935년부터 ‘울산왜성’을 시작으로 한반도의 왜성을 지정문화재인 ‘고적’으로 지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한 교수의 설명이었다. ▷下편으로 이어짐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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