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慶事)와 애사(哀事)
경사(慶事)와 애사(哀事)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9.05.2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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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후손들에게 이렇게 가르쳐왔다. ‘남의 집 경사에는 초청 받아야 가는 법이고, 남의 집 애사에는 초청하지 않아도 가야하는 법이다’라고. 경사는 축하해주어야 할 혼인 잔치, 돌잔치, 생일잔치, 회갑잔치 같은 일, 현대에 와서는 대학입학, 고시 합격 등을 말하는 것이고, 애사는 슬픈(슬플 哀; 아주 옛날에 옷이 아주 귀할 때, 옷(衣)이 헤어져 구멍(口)이 났으니 얼마나 슬플 일이겠는가) 일(일 事), 상(喪)을 당했거나 사고를 당했거나 병이 들어 누워있을 때 문상, 문병 등을 하라고 일러주는 말이다.

이 모두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있는 말이다. 경사스런 날의 대표 격인 회갑잔치에 가족과 친지만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덕담을 나누는데, 평소 이웃 간에 시비가 잦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불편하고 스트레스 받게 할 사람이 잔치 상에 같이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면 잔치분위기가 망가진다. 그래서 주인으로부터 초청 받은 사람들만 모여 즐겁게 보내라고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는 조심스런 예의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이런 잔치에 보기 싫은 사람이 떡하니 잔칫상에 버티고 앉아 있으면 어린애 주먹 반만 한 강엿(갈색의 단단한 엿)을 친절하게 맛만 보라고 먹이어, 입안에 엿이 들어있으니 다른 음식에 손도 못 대고 말도 참견 못하게 한다. 바로 ‘엿 먹이는 것’이다.

남의 집 애사에는 핑계 대지 말고 참석하라. 이 말에는 정말 우리 조상들의 숨은 지혜가 들어있다. 우선 애사를 당했으니 그 가족들은 경황이 없을 것이고, 이웃들이 그 집안과 사이가 좋았건 나빴건 알 수도 없어서 동네 사람 모두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다. 이런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같이 하여 슬퍼하면서 더 가까워지고, 화해(和解)할 사람들은 화해할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우리 조상의 이런 가르침이 들어있는 것이다.

필자가 직접 겪었던 일이다. 직장에서 10년 가까이 잘 지내오던, 15년이나 연하인 사람이 터무니없는 오해로 심한 욕설과 인격모독적인 말을 필자에게 쏟아냈었다. 그가 나중에 오해가 풀려 사과를 했지만 다 큰 어른들이라 서먹서먹하게 지내던 중에, 그의 부친상 이야기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나가는 말로 듣고 당장 문상을 갔었다. 빈소에서 마주친 그의 얼굴에는 진정 고마워하는 표정이 역역했다. 그는 4대 독자였다. 그러고서 얼마를 지나 자기의 늙은 후배 결혼에 꼭 필자가 주례를 서야 한다고 우겨서 주례를 서게 만들었다. 진정한 화해의 기회를 돌아가신 그의 부친이 만들어 주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일부 조문객들을 되돌려 보냈다. 비록 그들의 문상(問喪)이 형식적이고, 가식적(假飾的)이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고인(故人)도 원치 않는 일이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고 유서에 남기지 않았는가? 국민 화합의 이 좋은 기회를 자기들 진영끼리의 한풀이로 몰아갈 것인가?

고인은 노사모의 대상이었고,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고, 의지력이 무엇인지 고시합격으로 실증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제16대 대통령으로 서거했다. 아직도 안 모 씨, 유 모 씨 등등은 우리 편만이 진리이고, 상대편은 모두 악(惡)의 덩어리란 말인가? 두목을 잃은 조직폭력배들도 경쟁 패거리의 조문은 조용하게 받아들인다. 우리의 조상숭배는 종교적인 차원이다. 그래서 고인은 후손들에게 역사적 심판을 맡기며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고 하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네 편, 내 편 가리지 말고 국민 모두의 조문을 받아들이라고 간청한다.

/ 박문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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