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함이 빚은 비극
무지함이 빚은 비극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1.29 20: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간애’란 말을 들을 때 마다 모 대학교수가 쓴 회고록 중 일부가 생각난다.

서울 대학교에 재학 중 한국전쟁이 터졌다. 당시 22세였던 그는 간단한 훈련을 마치고 육군 소위에 임관돼 곧바로 전투에 투입됐다고 한다.

인민군에게 계속 밀려 내려오다 충북 옥천 근방에서 소대원 일부와 함께 그는 적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단숨에 남한 전체를 적화시키려고 했던 북한군은 포로를 제네바 협정에 따라 처우할 관용도, 여유도 없는 상황이었다.

포로로 잡힌 국군 장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인민군 대위는 상대방이 서울 대학교를 다니다 전투에 참가한 사실을 알았다. 20여명의 국군 포로를 처형하기 직전 그 대위는 국군 소위를 한 켠으로 불러 “이승만이 옳은 지 김일성이 옳은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너 같은 사람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은 안다“고 말했다. 전쟁 후 그 젊은 소위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됐고 “지금까지도 그 인민군 대위를 잊을 수 없다”고 회고 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 12월 24일 밤, 독일 서부전선 플뵈르 벌판에서 연합군과 독일군은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신들을 사이에 두고 참호 속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독일군 진영으로부터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노래가 울려 퍼졌다. 상상치도 못한 독일군의 캐롤 소리를 들은 영국 병사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독일 병사들은 참호 주변에 촛불을 꽂기 시작했고 한 독일군 장교가 참호에서 일어나 말했다.

“쏘지마라, 나는 독일군 장교다. 밖으로 걸어 나가겠다. 영국군 여러분 중에서도 장교가 한 사람 나와라.”

곧 영국군 장교 한 사람이 나가 대화를 시작했고 그 지역은 정전상태가 이뤄졌다. 이렇게 시작된 크리스마스 휴전은 야전 전화를 통해 인근 전선으로 퍼져 나갔다.

이 휴전은 전선에 따라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 동안 계속됐고 어떤 전선에서는 양측이 축구경기까지 했다.

전쟁위에 인간이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가 될 만한 것 들이다.

그런데 왜 1950년 7월, 9월 울산에선 같은 공동체 속에서 동독이 동족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 졌을까?

특무대, 경찰, 청년단 등 가해자와 죽임을 당한 ‘보도 연맹원’ 모두 무지했음이 그 원인이다. 7백여 명으로 추정되는 ‘좌익 용의자’를 처형하기 전에 진위 여부를 세 번, 네 번 확인하고 최종 결정을 고심하는 자세, 즉 인간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 앞에서 벌벌 떠는 약자들의 모습에서 연민과 고뇌 보다 오히려 오만과 독선을 확인했을 뿐이다.

무지가 빚은 비극의 상처는 피해자에게 더 오래 남는다.

자신의 정당함, 결백함을 주장할 수 없었던 이유도, 권력의 횡포에 대해 무조건 순종했던 어리석음도,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논리와 지식의 결핍도 모두 배우지 못한 무지함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그 들은 더 억울하다.

그래서 더 많이 배웠고 알고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우리가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쓰다듬어 줘야 한다.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