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초(留紅草)와 함께하는 가을맞이
유홍초(留紅草)와 함께하는 가을맞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10.04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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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초가 피어있는 가을이다. 유홍초는 열대 아메리카 원산으로 덩굴성 한해살이 꽃이다.

구월 중순쯤으로 기억된다. 작은 화단에 자리 잡은 홍도화(紅桃花)-백도화(白桃花) 그루 사이 그늘에서 줄기가 이미 한 척 길이로 자란 유홍초(留紅草)와 마주쳤다. 다가가 살펴보니 잎이 코스모스 잎과 백로 번식 깃을 닮은 ‘새 깃 유홍초’였다. ‘네가 왜 거기에 있어?’ 놀랍고 반가웠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언제인가 씨앗을 던져둔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떠올랐다.

며칠 후 큰 화분으로 옮겨 심고 물을 듬뿍 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새순들은 새로운 환경이 마음에 든 듯 달팽이 더듬이처럼 사방으로 손을 뻗으며 춤을 추었다. 하루는 일부러 여닫이문 앞으로 옮겨 놓았다. 매일 아침 가까이서 만나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줄기는 아침마다 새순을 내보이며 싱그럽게 뻗어가는 모습을 선사했다.

어느 날 아침 유홍초가 붉고 앙증스러운 꼬마 꽃을 피웠다. 뱁새 몸집이지만 입술에 붉은 립스틱 짙게 바른 모습으로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모습은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수 없도록 탄성과 감흥을 자아냈다. 새순은 매일같이 새잎을 징검다리 놓듯 하나둘 차례로 놓아 갔다. 짓궂은 가을비라도 내리면 새 깃 같은 잎새마다 수정 같은 물방울을 담아 놓기도 했다.

유홍초의 다른 이름은 ‘이탈리아 나팔꽃’이다. 나팔꽃이란 이름 탓일까, 아침에 핀 꽃잎은 저녁마다 흰 실낱같은 수술을 남기며 땅에 떨어지곤 했다. 짧은 생이 아쉬운 듯 시들고 쪼그라진 모습은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주워 살며시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을 요리조리 살펴봤다. 그녀는 나에게 속삭이듯, 투정 부리듯 말했다. “뜨거웠던 그 사랑도, 포근했던 꽃잠도 모두가 거짓이었죠”라고…. ‘항상 사랑스러운’이라는 꽃말을 간직한 한자 이름 ‘유홍초(留紅草)’. 그녀는 잠깐 곁에 머물다 떠나갈 운명이었다. 유홍초의 꽃말을 새기다 보면, 어떤 연인의 독백 같은 노랫말이 박새의 날갯짓처럼 뇌리에 포르르 날아와 앉는다.

사랑의 불씨 하나/ 가슴에 불 질러 놓고/ 냉정히 등을 돌린/ 그 사랑 지우러 간다/ 얼마나 달려가야/ 이 사랑 내려놓을까/ 어디쯤 달려가야/ 그리움도 놓을까/ 빼지 못할 옹이가 된/ 사랑 때문에/ 내가 운다(조항조, 옹이).

지난 일요일 오전 일찌감치 대곡 반구마을을 찾았다. 동매산 습지의 조류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흰뺨검둥오리 다섯 마리가 인기척에 놀란 듯 갑자기 물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먹이를 찾던 물닭 한 마리도 자리를 피한다. 여러 마리의 직박구리는 수다쟁이처럼 지저귄다. 때까치의 울음소리가 이곳저곳 가까이에서 들린다. 어치도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까치밥은 홍조가 들기 시작했다. 감나무 잎은 벌써 단풍이 들어 울긋불긋 바닥을 장식하고 있었다. 주위 풍경은 이미 가을로 접어든 듯했다. 이윽고 대곡경로당 곁을 지났다. 한실마을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모퉁이에 자리 잡은 주택 대문가에서 뜻밖에도 만난 길손은 유홍초였다. 붉은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고 있었다.

산속 한실마을을 찾았을 땐 가을비가 제법 소리를 내며 내리고 있었다.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섰다.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시선이 머무는 곳이 있었다. 긴가민가하고 다가가니 ‘으름’이었다. 키 큰 돌복숭나무를 감은 으름덩굴은 양쪽으로 하얀 속살을 드러내며 가을을 알려주고 있었다.

가을은 흰빛만이 아니었다. 붉은색도 함께였다. 고추, 고추잠자리, 유홍초, 코스모스, 까치밥, 여뀌, 꽃무릇, 석류, 가을볕… 어느 하나 붉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렇다, 가을볕은 오색딱따구리의 머리 깃만 붉게 물들이는 것이 아니다. 나들이 여인네들의 옷과 입술도 붉게 이는 것이다.

10월 첫 새벽도 백봉 닭의 울음소리로 방문을 열었다. 아침은 별 모양의 유홍초와 눈인사를 나누며 시작했다.

김성수 철새홍보관 관장·조류생태학 박사·울산학춤보존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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