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르라미(寒蟬)와 구구새(山鳩)
쓰르라미(寒蟬)와 구구새(山鳩)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8.31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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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는 쓰르라미와 구구새가 제법 보인다. 작지 않은 공원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아파트 베란다 방충망은 보기에 구멍이 세밀하게 뚫려있다. 그래서 통풍도 잘 되고 모기 같은 잔 벌레들이 들어오지 못한다. 가끔 매미가 날아와 방충망을 잡고선 신나게 울어대다 간다. 귀청이 따가울 정도로 울다가 인기척이 나면 금방 사라진다. 10여 년 동안 땅속에 살아서 그런가, 온 힘을 다해 원망을 다 토해낸다.

덩달아 구구새 ‘산구’(山鳩)도 가끔 베란다 창틀에 앉아 쉬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놈은 아직 나와 친하지 않아선가 쉬 도망가 버린다.

‘매미’를 한자로 쓰면 ‘蟬(선)’이다. 형성문자를 보면 재미있다. 벌레 ‘충(蟲)’에 쓸쓸할 ‘단(單)’을 붙인 한자 모양이다. 나무에 붙어있는 벌레처럼 혼자(單) 있으니 쓸쓸하기 짝이 없다. 그래선가 외롭게 울부짖는가 보다.

그런 매미가 이젠 보이질 않는다.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행방을 알 수 없다. 어느 나뭇가지에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마도 나뭇가지에 그냥 붙어 울지 않고 있을 뿐일 거다. 왜냐면 매미는 추우면 울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한선(寒蟬), 즉 쓰르라미 매미다. 소리 내어 울면 죽을까 봐 몸을 도사리는 것이다.

그래서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이 그린 걸작 ‘송림한선(松林寒蟬)’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심오하다. 그가 지금의 세태를 잘 말하고 있는 듯하다.

‘금사여한선(襟事如寒蟬)’이라고, 추위 속 매미같이 입을 다물고 있듯, 침묵을 지켜 말하지 않고 감히 의견을 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국이 언론자유를 옥죄면서 홍콩 바닥에 등장한 새로운 용어가 바로 ‘한선 현상’이 아닌가?

‘춘와추선(春蛙秋蟬)’이라는 말도 있듯이, 봄철 개구리와 가을 매미의 시끄러운 울음소리에 지나지 않을 그런 무용한 언론이 될까 요즘 걱정이다.

대통령이 언젠가 말했다. “언론이 제대로 감시하고 비판하면 권력이 부패할 수가 없다”고. 그래서 “언론자유가 정권도 지켜준다”고 했으니 분명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이젠 쓰르라미 매미 대신 아파트 안 공원에는 구구새 산구(山鳩)가 구우구우 하고 우는가 보다. 어쩐지 마음을 슬프게 해준다. 비가 오는 날이 아닌데도 우니 분명 구슬픈 사연을 담고 있는 듯하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날짐승인데도 말이다.

보수당에서는 언론사의 허위·조작 보도에 대해 최대 5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을 물릴 수 있도록 한 개정안의 취지 자체를 반대한다. 반면 군소정당은 입법 취지를 인정하면서도 최대 5배로 한도를 설정한 근거가 모호하다고 한다. 또 언론사의 고의, 중과실 추정 조항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일반 시민 구제방안 또한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언론중재법 개정’이야말로 언론자유를 박탈하는 악법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고, 언론을 통제, 검열해 국민의 알 권리를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법안이 아닌가?

대통령이 말한 언론의 자유와는 상치된다. 언론이 없는 민주주의 사회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내 생각과 맞으면 정의이고, 내 생각과 다르면 불의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앞날이 어두워 희망이 보이질 않는다.

상식이 통하는 나라, 정의가 있는 나라, 공정이 살아나는 정부가 어서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오발선빈(烏髮蟬?)’같이, 멋있게 생긴 양 날개를 단 ‘한선(寒蟬)’은, 왜 울지 않는가?

김원호 울산대 명예교수, 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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