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항일투사 이관술
불굴의 항일투사 이관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8.18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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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광복절에도 독립운동가 이야기가 방송을 많이 탔다. 이상룡과 최운산 독립운동가의 밥상 이야기가 감동이었고, 조선총독부 철거 뒷이야기도 의미 깊었다. 이회영 후손들의 조상 이야기는 바로 역사였다. 서대문형무소 근처에 옥바라지를 위한 마을을 이루었던 작은 집들 이야기는 가슴을 때렸다. 홍범도 장군 유해가 카자흐스탄으로부터 78년 만에 귀환하는 화면을 보고는 박수를 쳤다. 울산 출신 독립운동가가 주인공인 방송도 있었으니, <불굴의 항일투사 이관술>이다.

MBC에서 조명한 독립운동가 이관술 이야기는 가슴을 저미게 했다. 며칠 전, 광복절 이른 아침에 울산 입암리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다큐 형식으로 진행한 것이다. 방송은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이관술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관술은 늦은 나이에 중동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그 어렵다던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진학했다. 동경고사를 졸업한 후 동덕여고보에 부임하여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던 전도유망한 교사였다.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은 그의 인생행로를 바꾸어놓았다. 동덕여고보 학생 250명도 학생자치와 경찰의 교내 출입 금지를 내세우며 시위에 나섰다. 전국에서 5만여 명이 참여했는데, 5천여 명이 퇴학이나 무기정학, 또는 구속을 당했다. 이관술은 이를 지켜보기만 하는 민족주의자들의 모습에 실망하면서 본격적인 항일운동의 길에 들어선다. 그는 교내에 독서회를 조직하여 지도에 나섰다. 이를 통해 이효정, 박진홍, 이순금, 손응교 등 걸출한 여성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유족들이 국가기록물보관소에서 찾아낸 서류에는 이관술의 주장들이 있다. 그는 1932년에 ‘조선자주독립선언 10개조’를 발표했다. ‘조선어 본위 교육 시행,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수업료 감면, 농민들의 수리조합 운영, 조선 농민들에게 국유림 분배, 구속된 조선인 애국자 석방, 조선 주둔 일본 헌병 철수’ 등이 그것이다. 일제는 그의 이런 주장을 무시하고 치안유지법 위반이나 반제국주의 동맹 결성, 경성콤그룹 결성 등 좌익 활동만 내세워 그를 범죄인으로 낙인찍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다수 노동자층의 삶은 참담했다. 임금은 일본인의 절반에 불과했고, 차별이 만연했다. 그는 ‘경성 트로이카’ 활동을 통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이재유와 만난다. 이재유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1급 사상범이었다. 이관술은 막노동꾼, 엿장수, 솥땜장이로 변장하여 전국을 누비며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노동자들의 동맹 휴업을 주도했고, 기관지를 발행해 노동자의 권리개선을 외쳤다. 그는 두 번 체포되어 4년 동안 옥살이를 했고, 7년간 도피 생활을 했다.

1945년 10월, 이관술의 운명을 뒤바꿀 사건이 발생한다. 미 군정이 해방 후 자금난을 겪던 조선공산당이 조선정판사 지하실에서 1천2백만 원의 위조지폐를 찍었다고 발표한 것이다. 당시 재정부장을 맡고 있던 이관술과 간부들은 주범으로 체포된다. 가장 신뢰받던 정치가에서 희대의 위폐범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결국 이관술은 위폐 발행을 지시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이와 관련해서는 그 부당성을 지적한 박사학위 논문이 이미 발표된 바 있다.

방송에는 학암 이관술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이웃에 살면서 갖은 고초를 겪었던 노구의 사촌동생 남매의 기억들은 참 귀한 진술이었다. 학암의 다섯 자매 중 유일한 생존자인 막내딸은 소통이 불가한 상황이어서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외손녀 두 분이 외조부의 학창시절 유품들을 보면서 하던 회고에 마음이 아릿했다. 최초로 이관술 이야기를 썼던 기자, 연구에 깊이를 더했던 작가, 조선정판사 위폐범의 허구를 파헤친 연구자 이야기도 귀하게 들었다.

1950년 6월 28일,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7천여 명이 총살당했다. 희생자들은 모두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과 보도연맹원들이었다. 발굴된 무덤의 길이만 1km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이곳에서 맨 처음 처형된 인물이 ‘이관술’이었는데, 국가는 이미 유족들에게 그의 죽음을 배상했다. 그 무렵에는 사상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라는 핑계로 파렴치범으로 내몬 것은 부당했다. 독립운동가의 위대한 족적을 이념의 잣대로만 지울 수는 없다.

이정호 수필가·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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