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살} 감자 한 소쿠리
{아침햇살} 감자 한 소쿠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9.05.13 21: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젊은 시절, 농촌지역에 있는 중학교에서 잠시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 한 학년 학생이 2백50명 남짓해 전교생이라고 해 봤자 7,8백여 명에 불과한 시골학교였다. 당시는 요즘처럼 교직이 대우를 받지 못해 교사 이직율(離職率)이 꽤 높았다. 일부 교사는 다른 자리로 옮겨 가기 전 잠시 머무는 곳 쯤 으로 여기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특히 시골 사립 중학교에 눌러 앉아 청춘을 바친다는 ‘페스탈로치 교사’는 드물었다. 물론 예외적인 교사도 있어 당시 같이 근무했던 동료 중 한 사람은 지금 그 학교의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생활하다 고향으로 내려와 딱히 할 일이 없었던 필자로선 그 학교에 가게된 것만도 지금 생각하면 다행스러웠던 것 같다. 그런 저런 분위기 때문에 탐탁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냥 휑하니 놀기엔 뭣해 그 중학교로 출근을 한 것은 새 학기가 막 시작된 3월 초순 이였다. 이런 밋밋한 기분 속에서도 즐겁게 출근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학생들이 의외로 순수한데다 낯선 사람에게 베푸는 예의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처음 교단에 섰던 관계로 수업 중 실수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선생님’이란 대상 하나로 모든 걸 인정해 주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의 대다수가 농촌 출신이라 가정 형편이 어려웠고 이 탓에 학력이 굉장히 뒤처져 있다는 점이였다. 영어의 가장 기본적인 문법조차 모른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농촌 일손이 모자랄 땐 학생들이 결석하는 것을 당연시할 정도였으니 이런 상황은 피할 수 없는 것 이였는지도 모른다. 청보리가 들판을 뒤덮고 모내기가 시작되면 학교는‘가정실습’에 들어갔다. 아예 일정기간 동안 수업을 중단하고 아이들이 집안일을 돕도록 임시 휴교하는 시기였다. 상황이 이 정도니 그들에게 도시학생 수준의 학력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젊은 혈기와 무모한 공명심이 ‘학력 미진아’들을 학교에 남도록 하고 그들을 볶아대기 시작했다. 세 번, 네 번 가르쳐도 모르면 매를 들기 일쑤였다. 여학생들이라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렸지만 감정이 격해지면 따귀도 때리고 종아리도 매질했다. 그렇게 혼쭐을 뺏건만 여전히 못 따라오는 한 여학생이 있어 가끔 수업시간이 공포 분위기에 휩싸이곤 했다. 얼굴이 예쁘장한 아이였는데 당시 시골 여학생 치곤 얼굴과 몸치장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학생이였다. 그 날도 창밖으로 보이는 보리밭에 어둠이 깔릴 때까지 무료 ‘방과후 수업’을 했다. 그런데 유독 이 아이만 수업 중에 옆 사람과 소곤거리고 힐끔거렸다. 소위 ‘전체 분위기’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여학생을 앞으로 불러내 심하게 매질을 가했다. 회초리가 아니라 나무막대로 종아리를 때렸다. 요즘 같으면 폭력 교사로 몰려 직장을 그만두고 매스컴에 단독 출연할 정도로 심하게 때렸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학생과 학부모는 순수했다. 그 때는 선생님에게 제자가 매 맞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우선 부모들이 항의할 생각 자체를 갖지 않았다. 오히려 교사에게 미안해했다. 자식이 매 맞은 흔적을 보고 맘 아프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 시절 아버지, 어마니들은 선생님을 그렇게 예우했다. 종아리를 벌겋게 맞아 절뚝거리며 제 자리로 돌아간 그 애는 계속 엎드려 울었다. 서운하고 원통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행동마저 반항으로 여기고 교실이 떠날 갈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치지 못해!”하는 소리에 억지로 울음을 삭였지만 잔 울음은 계속됐다. 그 날 이후부터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엔 커다란 벽이 생겼다. 서로를 벽안시하는 태도가 3,4주 계속됐다. 그 해 스승의 날 저녁에 그 아이가 감자를 한 소쿠리 담아 와 내 자취방 앞에 두고 간 것을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야 알았다. 감자의 상당수는 썩은 것 이였지만 내겐 소중했다. 맞은 것이 못내 억울했겠지만 선생님을 무조건 인정하는 그 아이의 순수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또 다시 회초리로 때리고 훌쩍거리며 우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 해 겨울방학이 끝 나갈 무렵에 난 그 곳을 떠났다. 담당했던 중3학생들의 입시결과를 지켜보지 못하고 떠난 셈이다. 요즘 가끔 학생체벌에 대한 찬, 반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이럴 때 필자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40년 전 그 중3 여학생 때문이다.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