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빛바랜 기억
사진 속 빛바랜 기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7.19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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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살이 십 년 차에 접어든 국악 소리 신동 김태연(2012년생)이 다시 부른 가요 ‘바람길’의 가사와 창법이 가슴을 애잔하게 해 반복해서 듣고 있다.

“길을 걷는다. 끝이 없는 이 길/ 걷다가 울다가 서러워서 웃는다./ 스치듯 지나는 바람의 기억보다 더/ 에일 듯 시리운 텅 빈 내 가슴/ 울다가 웃다가 꺼내 본 사진 속엔/ 빛바랜 기억 들이 나를 더 아프게 해/ 길을 걷는다. 끝이 없는 이 길/ 걷다가 울다가 서러워서 웃는다.”(가요, 바람길)

지난 6월 23일 지인을 저녁 약속장소에서 만났다. 화가 이수원 선생이 별세하셨다고 전했다. 집으로 돌아온 필자는 사진첩에서 빛바랜 사진 두 장을 찾아 들었다. 한 장은 영축산을 배경으로 서서 찍은 사진이고, 다른 한 장은 차를 마시는 장면이다. 사진 뒷면에는 잉크 자국도 선명하게 1998년 11월 29일 자가 뚜렷이 적혀있다. 23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가며 오랜 시간 마음속에 품은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사진 속엔 조홍제, 박동훈, 최희, 김태근, 이수원과 필자 모두 여섯 명이 차상(茶床)을 중심으로 반달 형태로 둘러앉았다. 찻잔을 손에 들고, 찻잔을 방바닥에 놓은 분도 모두가 입가에 웃음을 띠며 평화로운 분위기다. 사진 속의 장소는 통도사(通度寺) 자장암(慈藏庵) 취현루(醉玄樓)이고, 사진 촬영은 우찬 서진길 작가가 맡았다. 한 장의 사진이 23년의 사연을 담고 있었다.

한 장의 사진은 수 시간의 연설보다, 수천 장의 자료보다 많은 의미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당나라 시인 한유(韓愈, 768∼824)는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서 ‘…새가 울어 봄을 알게 하고, 우레가 울어 여름을 알게 한다. 벌레가 울어 가을을 알게 하며, 바람 소리에 겨울을 알게 하네…(以鳥鳴春 以雷鳴夏 以蟲鳴秋 以風鳴冬…)’라고 했다. 세월의 흐름을 울음소리의 변화를 통해 말하고 있다. 무정세월약류파(無情歲月若流波=무정한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으니)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 소쩍새는 아직도 산에서 우는데 여름은 오락가락 장마로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벌써 화단에서 실솔(??=귀뚜라미)이 운다. 겨울 떼까마귀 울음소리가 가까이 온다.

조홍제(1926~2001) 선생은 울산 출생으로 시인이자 수필가이며 한글학자였다. 박동훈(朴東勳. 1933~2003) 선생은 울산에서 활동한 방송인이었다. 최희(崔熙. 1930~2009) 선생은 최희화숙(崔熙畵塾)을 열어 수강료를 받지 않고 미술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등 울산미협이 미처 태동하기도 전에 미술의 씨앗을 뿌린 분이었다. 김태근(金兌根. 1920~2011) 선생은 울산문화예술계의 원로로 극작가, 수필가이자 연극인으로 활동한 울산 근대문화사의 산증인이었다. 이수원(李壽原. 1927~2021) 선생은 일찍부터 화가로 활동하며 1954년 12월 ‘내 고향 다방’에서 시화전을 열었던 분이었다.

작고하신 다섯 분은 모두 울산 예술인으로, 예원회(藝苑會=‘예술가들의 사회’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의 초창기 회원이셨다.

현재 울산 문화예술계의 원로는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변하고 있다. 문화예술계의 정서가 어떠한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혹여 작고한 예술인에 대한 예(禮)보다 결례(缺禮)는 없었는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루 한 개의 사과를 먹으면 의사를 멀리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생 경험자의 말에 귀 기울이면 분명히 삶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자문(諮問)을 구할 울산의 전문 문화예술인이 무정세월에 흐르는 물처럼 사라져 가서 안타깝고 아쉽다.

세상에 오는 것은 차례가 있지만 떠나는 것은 차례가 없는 것 같다. 누구 할 것 없이 고개를 들어 돌아보면 얼마 남지 않은 인생살이다. 다섯 분과 함께한 빛바랜 기억들이 필자를 숙연하게 한다. 모두 자유로운 영혼이 되시어 높은 하늘을 맘껏 날아다니시기를 망축(亡祝) 한다.

김성수 철새홍보관 관장·조류생태학 박사·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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