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착오를 위한 시간은 없다
시행착오를 위한 시간은 없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3.02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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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그림이나 사진은 수 시간의 연설보다, 수천 장의 자료보다 많은 의미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2019년 여름 한 장의 사진작품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여러 장의 사진을 디지털 보정작업으로 초현실적인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에릭 요한슨(Erik Johansson)의 2017년 작품 ‘Demand and Supply’이 바로 그것.

망망대해에 높이가 높은 섬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그런데 모습이 이상하다. 하나같이 아랫부분이 윗부분보다 좁은 와인 잔 모양이다. 자세히 보면 섬의 윗부분에는 도시가 형성되어 있고, 아랫부분에는 도시에서 필요한 자원을 중장비로 채굴해서 도시에 공급하고 있다. 도시는 그렇게 생성되고 발전한다. 하지만 자원 공급이 늘어날수록 윗부분의 도시는 안정성이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원과 재화를 끊임없이 소비하는 현대 자본주의 도시의 야만성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고, 미래 도시의 삶은 지속 가능할 것인가라는 고민에 그 자리에서 한참을 바라봤다.

2020년에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장의 사진과 그림은 지난여름 수해를 다룬 보도사진으로, 황소가 생존을 위해 지붕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를 보면서 생명의 터전인 이 지구가 큰 병을 앓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6번째 대멸종이 일어나고 있는 지구를 병들게 만든 것은 인류이며, 인류가 현재와 완전히 다르게 생활방식의 대전환을 이루지 않는다면 인류 역시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지구의 경고로 느껴졌다.

사실 그 보도사진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은 모 일간지에 수록된 한 컷의 만평 때문이었다. 예의 보도사진이 선보이기 전에 기후위기를 다룬 상징적인 장면의 하나는 다 녹아버린 빙하에 힘겹게 의지하고 있는 ‘북극곰’이었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어서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체감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작년 수해 이후에 등장한 한 컷의 만평에는 조그만 얼음조각 위에서 몸을 가누고 있는 북극곰과 지붕에 힘겹게 올라가 있는 황소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그림 위에 ‘기후변화’라는 문구가 녹아내리는 모양으로 적혀있었다. 체감하지 못했던 기후위기가 바로 우리 삶의 공간에서 이뤄지고 있고, 그 심각성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한 컷이었다.

이상기후의 발생빈도와 규모가 해를 거듭할수록 커지고 재해의 규모도 덩달아 커지면서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공감대가 날로 확산되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과학자를 비롯한 많은 전문가와 일부 정치인들은, 기후변화가 우리가 체감하는 속도는 아니라 해도 진행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고, 어느 수준이 지나면 그 속도가 매우 빨라지며, 그때가 되면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끊임없이 경고해왔다. 그리고 그 시기가 되면 과거로 되돌릴 수 없는 만큼 온실가스 배출을 현저히 줄여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번번이 경제 논리에 밀려 실행으로 옮겨지는 데 한계가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기후변화의 속도가 증가하고 그 피해 규모가 커져 기후위기 수준에 이르자 기후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확대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노력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이미 진행되고 있는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우리나라 역시 그 발걸음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걱정되는 부분은,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대전환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경제적인 손실로 인해 많은 분야에서 저항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에릭 요한슨의 작품처럼 현재의 문명발전 방식은 많은 생명의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수준은 더 이상의 시행착오를 허락할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이제 생존을 위해 커다란 고통이 따르더라도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대전환을 이뤄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컷의 만평을 소개하며 얘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아버지가 “받으렴 아들아. 너의 미래를 위해 모은 돈이란다(Here son, I saved all this money for your future)”라며 아들에게 돈주머니를 건넨다. 하지만 그 돈주머니를 받는 아들은 산소탱크를 메고 산소마스크를 쓴 모습이고, 배경에 보이는 것은 말라죽은 한 그루의 나무뿐이다. 우리가 바라는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닐 것이다.

마영일 울산연구원 시민행복연구실· 환경공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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