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등재 앞둔 대곡천암각화 소개책자 집필 중이죠”
“세계유산 등재 앞둔 대곡천암각화 소개책자 집필 중이죠”
  • 김정주
  • 승인 2021.01.19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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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화가로 돌아가는 암각화 학자 이하우 교수

은퇴 후엔 선사미술 무크지 펴낼 생각

태화강이 풀리면 그는 자택이 있는 포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정년이 되는 2월 말을 끝으로 만 7년간 열정을 쏟았던 연구소와 작별을 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울산대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의 이하우(李夏雨, 65) 교수.

 

다시 화가로 돌아가는 암각화 학자 이하우 교수.
다시 화가로 돌아가는 암각화 학자 이하우 교수.

‘암각화 학자’라는 직함에 자긍심이 대단한 그는 연구소를 떠난다고 암각화 연구와 담을 쌓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포항시 대잠동 자택 근처 개인연구실(‘Rhee’s Studio‘)에 걸어놓은 <한국선사미술연구소> 간판의 먼지부터 걷어내고 새로운 의욕의 색깔로 덧칠할 참인 탓이다.

이 연구소의 ‘연구원’ 자리를 이미 예약해놓은 이들이 있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박영희 박사와 프랑스-러시아 유학파인 박성현 박사가 그들. 이 교수는 이들과 암각화를 비롯한 선사미술을 주제로 한 비정기적 학술잡지(무크지)를 수시로 펴내기로 하고 밑그림도 이미 다 그려놓은 상태.

그렇다고 본업인 현대미술 쪽에도 소홀할 그가 아니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이 교수는 영남대에서 ‘회화학’을 전공했다. 2009년, 경주대 대학원에서 <한국 암각화의 제의표현에 관하여>란 논문으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은 그보다 몇 년 뒤의 일.

사실 그는 본디 전공에 대한 애착이 많았다. 한국과 호주에서 개인전을 4차례 갖고 그룹·기획전에만 280회나 참가했다니, 미루어 짐작이 간다. 그전에는 영일교육재단 산하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1983~2013), 울산에 새 둥지를 트기 전까지는 ’한국선사미술연구소‘ 소장(2006~2014)도 역임했다.

그의 말마따나 그전까지는 ‘대구·경북 일대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하면서 살던 화가’일 뿐이었다. 그러던 그의 시야에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암각화의 세계’. 이야기는 ‘1989년 초겨울 어느 날’로 거슬러 오른다.

2005년 몽골 알타이 옐란가쉬 조사.
2005년 몽골 알타이 옐란가쉬 조사.

 

‘칠포리암각화’ 발견 계기 ‘만학의 길’

“스케치 겸 산보하러 나갔다가 포항 칠포리 일대에서 우연히 바위에 그려진 그림들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도로변에 있는 고인돌에 관심이 가서 여기저기 살펴보는 도중에 암각화가 눈에 들어온 것이지요.”

호기심은 차츰 학문적 관심으로 커져 갔다. 바위그림의 성격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 뒤로 이 교수는 암각화연구자 여러분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질문도 던졌다. 하지만 궁금증은 더해만 갔다. 그러던 차에 전주대학교 송화섭 교수가 이런 권유를 해왔다. “그럼, 이 선생께서 직접 한번 연구해 보시죠.”

‘칠포리암각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그래서 시작됐다. 자신의 말대로 ‘만학의 길, 초보연구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 경주대학교 대학원 강봉원 교수한테서 고고학을 배운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발견 때(1989)부터 박사학위 취득 때(2009)까지 꼭 20년이 걸렸다. <칠포마을 바위그림>(고문연 1995)은 그 중간에 빛을 보게 된 저서.

그 뒤에도 암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포항 칠포리암각화를 비롯한 국내 암각화 유적 6곳이 그의 예리한 눈썰미 덕에 발견됐고, 기록도 보고서로 남게 됐다. 1995년부터 25년간 유라시아와 호주대륙의 암각화 유적 조사 임무를 수행했다. 그 속에는 2001년부터 호주에서 보낸 1년간의 조사활동이 포함된다. (2001년이라면 이 교수가 반구대암각화 실측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해이기도.) 이 소중한 체험들은 이 교수 나름의 독보적 안목을 키우는 데 더없이 기름진 밑거름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이 교수는 2014년 초, ‘암각화 분야의 대가’ 전호태 교수의 연구실 문을 노크하기에 이른다. 전 교수가 소장직을 맡고 있던 <울산대학교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에서 새 둥지를 트고 싶어서였고, 연구소는 흔쾌히 그를 받아들인다. 그로부터 7년. 이제 그는 그의 체취가 구석구석 스민 이 둥지를 싫어도 떠나야만 한다.
 

2019년 몽골 알타이 암각화 바양얼기 사슴돌 조사.
2019년 몽골 알타이 암각화 바양얼기 사슴돌 조사.

 

“후학에게 길 터주는 게 학문적 자세”

울산대 연구소 재임 기간에도 그의 활약상은 대곡천의 바위그림처럼 다양한 흔적으로 남는다. 주요논문 △대곡천 암각화군의 제작 기법연구(문화재청, 2016) △동물표현으로 보는 천전리각석의 시간(울산암각화박물관, 2020)이 손꼽힌다. 주요저서 △한국의 검파형암각화(공저, 2016) △한국 풍요제의 암각화(공저, 2017) △The BANGUDAE PETROGLYPHS in Ulsan(2019) △암각화로 보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性(2019, 세종도서 우수교양도서)도 이 시기의 산물.

학술연구총서만 해도 지난해의 <한국의 암각화 2020>을 비롯해 어느덧 7권째에 이른다. 처음 부임한 2014년부터 1년에 한 권씩 내기로 한 원칙이 고스란히 지켜진 것. 그만큼 학문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는 빈틈의 여지가 별로 없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는 원칙은 각종 학술대회에 대한 평가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이 교수가 존경하는 인물 중에는 대곡천 암각화를 1년 간격으로 2차례나 발견, 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가 있다. 그러나 문 교수의 학문적 태도만은 그의 존경 대상이 아니다. 후학들에게 ‘부단한 학문적 천착’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복종과 추종’을 요구한다고 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50년 전 얘기에서 벗어나지 못하시는 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50년 전’이라면 문 교수가 국보 285호 ‘반구대암각화’를 처음 발견했다고 학계에 보고한 1971년을 뜻한다. (그 1년 전인 1970년엔 국보 147호 ‘천전리각석’을 발견한 바 있다.)

그는 지난해 10월 30일, 동구의 한 호텔에서 열린 ‘천전리 암각화 발견 50주년 기념 학술대회’의 뒷얘기를 넌지시 들려준다. “말로 안 되니 ‘내 업적을 보고 공부해라’고 오히려 나무라십디다. 후학들이 더한층 정진하도록 독려해 주시는 것이 바른 학문적 자세일 텐데….” 문 교수가 ‘암각화’나 ‘바위그림’이란 표현 대신 ‘암벽화’를 고집하는 태도도 솔직히 못마땅하다. 세계의 암각화에 대한 안목이 좁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2012년 카자흐스탄 세계유산 탐갈리 조사.
2012년 카자흐스탄 세계유산 탐갈리 조사.

 

울산 해안초소 경계근무 2년3개월

울산과의 첫 인연이 울산대 연구소는 아니다. 1980년 7월부터 2년 3개월 동안 울산경비사령부 소속 해안경계병으로 근무한 것이 그보다 앞선다. “세죽 일대의 해안경관이나 동백섬, 온산 일대의 해안경치에 그만 매료되고 말았지요. 그때 보았던 이진리의 해당화는 아직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생생하게 남아있고.”

1984년, 반구대암각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기억도 되살린다. “마치 수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맛보는 감동이었습니다. 그때의 선사예술가가 되어 유적을 찾은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제가 암각화 연구자가 된 것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일까. 그는 떠난 후에도 씨름할 거리가 있다. 국보로 지정된 양대 대곡리 암각화에 대한 저서를 집필하는 작업이 그것. ‘목차’에다 부록(‘물길 따라 걷다가 보면’)까지 정해두고 막바지 집필에 열중하는 중이다. 울산시민이 주된 독자로 삼을 계획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지역사회의 참여가 절대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대곡천 암각화를 누구보다 시민들께서 잘 아셔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암각화학자로서 울산시민, 지역민사회가 대곡천 암각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학술적으로 고민해 왔는데, 이를 뒷받침해보자는 뜻도 있었고요.” 이 교수는 그의 ‘작은 책’을 비롯한 연구서나 보고서가 많이 보급되고, 유적관련 강좌가 개설되고, 유적 가까이 다가가 실물도 보고 보호·정화도 하는 그런 보여주기 식 행사도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1999년도부터 한국암각화협회 이사직을 맡아오고 있는 그의 정년퇴직이 울산으로선 큰 손실이란 말이 주변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전호태 교수를 제외하곤 암각화 연구에 목숨을 건 전문가가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암각화 관련 논문을 1편이라도 쓴 연구자가 울산에는 한 명도 없다”는 개탄이 그래서 나온다.

6년 아래 배연진 여사(59)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 ‘전통시장(5일장) 나들이’가 취미.

글= 김정주 논설실장/ 사진=최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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