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의 ‘피아노 3중주’, 울산무대에 꼭 올리고 싶어요”
“윤이상의 ‘피아노 3중주’, 울산무대에 꼭 올리고 싶어요”
  • 김정주
  • 승인 2020.12.22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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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살때부터 피아노 독주회… 음악적 재능 뛰어나‘윤이상 선생’ 처음 작곡한 피아노 3중주 악보 공개“시립 교향악단·합창단 공연에 올리는 방안도 바람직”
김우연 피아니스트 겸 섬유예술가가 윤이상의 빛바랜 악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악보에 친필 “윤이상 아저씨가”

애지중지 간직해온 소장품인 듯 겉포장을 여는 손길에 바르르 파동(波動)이 인다. 장롱 깊숙이 갈무리해 두었을 대학노트 크기의 빛바랜 악보(樂譜) 세 권이 이방인의 시야 속으로 빨려든다. 얼마만의 바깥나들이일까.

12월 19일 점심나절, 한옥 음식점 ‘농도’(울주군 상북면)의 전망 좋은 방. 칠십 줄의 예인(藝人) 두 사람이 키 낮은 나무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피아니스트 겸 섬유예술가인 김우연(金旴蓮) 여사(76, 통도사 앞 ‘연 갤러리’ 대표, 울산)와 작곡가 출신 김광일 지휘자(72, ‘인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전임지휘자, 김해). 둘 사이를 ‘연세대 음대 동문’이라는 연결고리가 맺어줄 것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김 여사가 피아노과를 나왔다면 김 지휘자는 작곡과를 나왔다는 사실이다.

음식이 나오기 전, 두 예인 사이를 좁혀준 대화의 물꼬는 펴낸 지 65년 된 낡은 악보집이었다. 와 이를 뒤받쳐주는 바이올린과 첼로 악보 한 점씩이 그것. 포장지의 메모쪽지에 눈길이 갔다. “윤이상 선생님이 처음 작곡한 피아노 삼중주 악보…선생님 친필이 책 첫 장에 있음.”

호기심은 ‘책 첫 장’으로 직행했다. 흐릿한 만년필 자국이 표지 뒷장 언저리까지 번진 작곡가 윤이상(1917.9~1995.11)의 친필(親筆)이 분명했다. 페이지 사이 세로글씨를 몇 번이나 살폈다. 다음은 친필 내용. “김희자에게. 얼런(→얼른) 커서 이 곡을 연주하여 주기를 바라며, 윤이상 아저씨가”

‘김희자’란 김우연 대표의 옛 이름. 3년 전쯤 법원에 개명(改名)을 신청한 것이 용케 받아들여졌다고 했다. 이유에 대한 설명이 재미를 더했다. “자(子)자로 끝나는 이름이 너무 촌스러워서….”

‘피아노 3중주’는 윤이상의 초기작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피아노 3중주>(TRIO for Violin and Cello)에 대한 얘기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윤이상 아저씨가 주신 악보를 어릴 때 보았는데 너무 어려울 것 같아서 손을 안 댔어요. 지금은 마음이 딴 쪽(섬유예술)에 가 있어서 더 그렇고….” (김 여사는 윤이상 작곡가를 지금도 ‘아저씨’라고 불렀다.)

사실 김우연 여사의 ‘무대 경험’은 다섯 살 때로 거슬러 오른다. 피아노 연주곡 10곡이 수록된 입학용(入學用) 녹음테이프를 프랑스 ‘국립고등음악원’에 보내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것.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경향 콩쿨(→콩쿠르)’을 앞둔 그해 10월 28일, 경향신문은 출연자 소식 난에서 어린이 김희자를 ‘제일 나이가 적은 7세 소녀 김희자 양’, ‘꼬마 중의 꼬마 음악가’로 소개했다. 이 무렵은 김 여사가 부산 ‘중앙국민학교’ 1학년에 적을 두고 있었다. 김 여사는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안태고향인 마산의 ‘강남극장’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연 적도 있었다. 부산으로 이사 온 후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부산 하얄리아 미군부대에서 일요일마다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김 여사가 피아노와의 사랑에 빠져들게 된 데는 부산 수정동에서 병원을 차렸던 돌아가신 아버지 김일운 선생의 입김이 컸다. 또 그 이면에는 아버지와 같은 또래의 절친 윤이상 선생의 권유가 결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김 여사의 뛰어난 음악성을 어릴 때 이미 알아차렸던 것, 김 여사의 귓병 악화로 프랑스 유학의 꿈은 끝내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이면에 숨은 윤이상 선생의 노력은 너무도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백건우의 “모른다”에 섭섭한 감정

세계적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74)가 ‘부산 피난’ 시절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운 이면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숨어있다. 어릴 적 몸이 약했던 백 씨는 부친을 따라 김 여사의 집(병원)을 자주 드나들었고, 김 여사의 피아노 소리에 매료된 백 씨 부친의 주선으로 어린 김희자의 연주 모습을 어깨 너머로 보고 음감(音感)을 익혀 나갔다는 것.

이 무렵 이비인후과 의사였던 김 여사의 아버지는 피난민의 천국이었던 부산에서 X레이 기기를 드물게 보유한 덕분에 일찌감치 돈방석에 앉는다. 그렇게 번 돈으로 그는 처지가 어려운 예술인들을 사심 없이 지원했다. 작곡가 윤이상 선생,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도 그런 범주의 인사들.

그러나 피아니스트 백건우에 대한 김 여사의 감정은 그다지 좋지 않다. 프랑스에서 귀국한 후 순회공연에 나설 당시 김 여사는 둘의 관계를 잘 아는 서울의 지인을 통해 안부를 전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모른다”는 섭섭한 대답뿐. 지난해 말쯤 양산 통도사 설법전 독주회 때는 직접 찾아갔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김 여사의 말이다. “연주회를 마치고 팬 사인회도 끝나갈 무렵 찾아간 제가 질문을 던졌지요. ‘김희자를 아느냐’고…. 그랬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어요. ‘50년 전의 일을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고 말이죠.” (김 여사는 백 씨보다 두 살 위였지만 학년은 같았다.)

“울산 음악인들 울산서 연주 희망”

대화는 다시 ‘악보집’으로 돌아갔다. 주전공이 작곡(作曲)이었던 김광일 지휘자가 유심히 살핀 끝에 말문을 열었다.(그는 인제대 교수와 부산·마산 시립합창단 지휘자를 역임한 바 있다.) “전체가 4악장인데, 길이를 보니 연주시간이 15분에서 25분쯤 걸릴 것 같군요. 인쇄가 돼 있고 출판당시 100~200부 정도 찍었다고 보면 희소성은 그리 높지 않을 겁니다. 통영 ‘윤이상 기념관’의 작품목록에 올라있을 수도 있고…. 다만 연주나 CD에 대한 기록은 못 찾았는데, 이 곡을 지금 연주한다면 초연(初演)일 가능성은 있지요.”

악보집을 한 번 더 살펴보았다. 한자투성이인 출판이력서가 눈길을 끌었다. <1955년 6월 10일 인쇄/ 1955년 6월 15일 발행/ 저작자 윤이상(尹伊桑)/ 인쇄소 보진재(寶晉齋)> 1955년 6월이면 6·25전쟁이 끝난 그 이듬해다. 하지만 김 지휘자는 작품(피아노 3중주)의 완성 시기를 1994년으로 추정했다.

이번에는 김 여사가 입을 열었다. “처음엔 통영에 기증할 생각이었죠. 나중엔 백건우 씨한테 연주를 의뢰할까 했는데 그 생각도 접었고요. 이젠 피아노에 대한 열정이 옛날 같지 않게 식었으니, 고민이 많아졌다고나 할까요.”

김 작곡가가 다시 말을 받았다. 곡을 울산 음악인들에게 맡기고 연주도 울산에서 한다면 의미가 깊지 않겠느냐는 것.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했다. 울산시립 교향악단이나 합창단 공연 프로그램 중간에 무대에 올리는 방안도 들어갔다.

김 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름의 구상도 내비쳤다. “연주를 저의 제자인 윤철희 국민대 명예교수에게 의뢰하는 방법도 있겠어요. 독일 유학 후 울산대에서 재직한 경력도 있고, 미국 카네기홀 연주 일정도 잡혀있었던 분이죠.”

“못다 한 사연, 기록으로 남길 것”

김 여사가 걸어온 과거의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다. 우여곡절도 많았고 사연도 많았다. 그만큼 하고 싶은 말도 한 아름이다. 아버지와 그렇게 친했던 윤이상 선생이 1967년에 세상을 뒤집어놓은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을 계기로 영영 멀어지게 된 일,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집안을 샅샅이 뒤져야 했던 이유, 미국으로 이민 간 동생들마저 입조심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 하며….

김 여사는 언젠가는 이런 일들을 구술(口述)을 해서라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벼른다. 하지만 당장은 코로나 사태가 발등의 불이다. 그래도 ‘연 갤러리’를 지키는 일만은 멈출 수 없다. 그 공간은 그래도 자신만이 누릴 수 있는 힐링의 세계가 아니던가. 통도사 방장스님이 감탄을 아끼지 않은 100호짜리 섬유예술작품에는 이런 이름도 붙여놓았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만나면 어떤 음악이 흐를까?>

갤러리에는 ‘2015 제33회 대한민국미술대상전’에서 받은 종합대상(‘문체부 장관상’) 수상작과 ‘2016. 제35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받은 특선 수상작도 자랑스레 걸려 있다. ‘2015 프랑스 토르망디 초대전’에서 받은 우수상, 대상 수상작은 영원한 영예로 각인될 것이다. 자랑스러운 기념품 한 가지만 더 소개하자. 그것은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 입학허가증(1956년 11월 19일)이다.

글=김정주 논설실장·사진=장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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