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 어머니의 일생 공간
툇마루, 어머니의 일생 공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6.2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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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는 긴 기둥 고주(高柱)와 짧은 기둥 평주(平柱) 사이 퇴칸에 놓인 마루를 말한다. 툇마루는 낮잠, 밥 먹기, 이야기, 곡식 말리기, 곡식 쌓기 등 다양한 공간으로 이용된다. 또 툇마루는 안방과 건넌방, 부엌 등의 동선을 연결시켜준다. 어머니는 매일 툇마루에 걸레질을 하셨다. 툇마루는 어머니의 일생의 공간이었다.

유월, 매일 새벽 4시경 집을 나선다. 삼호대숲에 서식하는 왜가리, 중대백로 등 백로류 7종의 이소시각과 개체수 그리고 태화강국가정원에서 관찰되는 새 조사를 마치고 여섯시 반경 집에 돌아온다. 조사시간은 계절 따라 다르지만 11년째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즐거움이다. 며칠 전 우연한 즐거움이 하나 더 생겼다. 대문을 나서 몇 걸음을 걸으면 두어 평 남짓한 작은 텃밭이 있다. 오래전 잡초에 묻혀있던 돌무더기를 많은 시간과 노동을 들여 일군 텃밭이다.

올해도 고추, 상추 두 종류를 심었다. ‘오뉴월 병아리 하룻볕 쬐기가 무섭다’는 말같이 상추 잎은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자랐다. 상추 잎을 솎으면 작은 소쿠리가 항상 넘친다. 못 다 먹으면 백봉(닭 품종)의 먹이로 준다. 이틀에 한번 꼴로 찾는 텃밭은 언제나 초록빛 싱그러움으로 가득하다.

오늘따라 잡풀로 덮인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이리저리 헤쳐 보니 작은 평상이 눈에 들어온다. 세워서 살펴보니 오래된 듯했다. 누군가 구석진 이곳을 미리 살펴본 뒤 버린 것 같았다.

소나무로 다듬은 길이 넉자 남짓한 평상이다. 옮기려하니 무게감이 만만찮다. 아마 가까운 거리의 아파트단지에서 이삿짐을 정리하다 이곳에 버렸을 것으로 짐작됐다. 그냥 내버리려니 들킬 것 같아 주위의 나뭇가지들로 가볍게 가려놓았던 것이 내 눈에 띄었을 것이다. 아무튼 버리러 온 사람의 초조한 마음과는 달리, 무거움을 애써 참으며 집으로 가져왔다.

이리보고 저리보고 만져보며 살폈다. 험하게 사용하지는 않은 듯했다. 빗자루로 잡티를 쓸어내고 걸레질을 했다. 유월 이른 아침의 따가운 햇살에 물기가 마르자 걸레질 덕분인지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색다른 느낌이었다. 앉아보니 편했고 마음은 기뻤다. 손님이 오면 마당에 둘러앉아 음식도 먹을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대나무 그늘에 두고 쉬고 있었다. 매주 화·목요일은 정해놓고 연습하는 날이어서 마침 울산학춤보존회 제자들이 하나둘 찾아들었다. “선생님, 멋진 평상 장만하셨네요!”, “너희 때문 아이가, 한번 앉아봐라, 좋다.” 이리저리 살피던 한 제자가 “선생님, 이거 주웠죠?” 한다. “아이다, 줍기는, 누가 이리 좋은 것을 함부로 버리겠노….”, “얼마 줬는데요?”, “마마, 얼마 줬으면 우짤낀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제자의 예리한 눈썰미에 흠칫했다. 그 후로 제자뿐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마다 앉아보니 좋다느니, 조금 더 높았으면 좋았을 걸, 비싸겠는데, 튼튼하네 하며 입을 댔다. 그럴 때마다 “아따 마, 길가 집 못 짓는다. 하도 지나가는 사람이 입을 대싸서….” 하면서 웃어넘겼다.

20여 년 전, 울산에 정착하면서 조립식 집을 짓다보니 툇마루는 감히 엄두도 못 냈다. 그러던 어느 날 행운이 찾아왔다. 옆집 유치원에서 오래된 나무 놀이기구를 철거하고 유행하는 플라스틱 재료로 교체한다고 했다. 얼른 원장을 찾아가 “내가 뜯어서 정리해줄 테니 그 나무 날 주소” 했다. 며칠에 걸쳐 품을 팔아 깔끔하게 정리해 줬다. 가져온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엉성한 툇마루를 놓았다. 비가 조금만 내려도 물을 머금고, 햇볕에는 그을기를 반복한다. 그래도 방문자마다 이 집의 중심은 툇마루라고 감탄하며 관심을 둔다.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툇마루 탄생의 숨은 이야기다.

주운 평상을 툇마루 곁에 세워두고 바라보니 문득 툇마루에 걸레질하시던 어머니 생각이 떠올랐다. 생각하면 툇마루야말로 어머니의 독백과 방백의 공간이며, 젊음에서 늙음으로의 변천이 기록된 현장노트인 셈이다. 새색시인 어머니의 신행(新行)은 대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좌우 웃각시의 도움으로 짚단에 붙인 불을 밟고 마당으로 들어선다. 마당에서 툇마루까지 길게 깔아둔 광목을 밟고 안방에 좌정한다. 어머니는 툇마루에 깔린 화이트카펫을 즈려밟고 시집오셨다. 다음날 어머니는 웃각시의 도움 없이 툇마루를 밟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툇마루를 밟는다는 것은 가택신(家宅神)인 성주신(城主神)께 시집살이를 묵시적 알리는 일이다. 툇마루는 걸어 들어간 색시가 아이 놓고 부모 섬기는 시집살이를 무사히 마치고 백발이 되는 과정을 지켜본다.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신 어머니가 생각나면 툇마루에 가만히 귀를 대어보라. 그곳에는 어머니의 이승 삶의 젊음, 늙음, 독백(獨白), 방백(傍白), 걱정, 근심, 웃음, 울음, 시집살이, 부모 걱정과 원망이 ‘무지개 색편 떡’으로 층층이 쌓여 있다.

소나무 재료인 마루판이 다복솔에서 청장목으로, 다시 황장목으로의 일생을 담고 있듯, 툇마루에 귀를 기울이면 어머니의 젊음과 늙음의 이야기가 달맞이꽃으로 피어난다. 소나무의 나이테가 드러날 만큼 걸레질된 툇마루의 직선을 따라 어머니의 체온도 느껴진다. 툇마루는 늙은 여인의 수다와 침묵이 함께하는 공간이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조류생태학박사·철새홍보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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