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드러난 불편한 것들
코로나19로 드러난 불편한 것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5.19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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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이었다. 필자가 난생처음 해외출장이자 해외여행을 간 것이. 행선지는 서독의 바덴 주에 있는 칼스루에(Karlsruhe)였다. 약 한달 동안 체류했는데, 적잖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들을 겪었다.

첫 번째 충격은 공산주의국가 사람들을 다수 만난 것이다.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을 가려면 남산에 있는 한국반공연맹(자유총연맹)에서 하루 종일 정신교육과 더불어 공산권 국가 사람들을 만났을 때의 대처요령과 첩보수집에 관한 교육을 받았었다. 그런데, 도착 첫날부터 중공(중국) 사람을 만나고 이어서 쿠바, 헝가리 등 공산권 국가 사람들을 줄줄이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는 북한 사람까지 만났다.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에 못지않게 충격을 받았던 일이 또 있었다. 머무는 숙소 건너편에 kino(영화관)가 하나 있었는데, 당시 상영하던 영화가 ‘Maurice’라는 영국 영화였다. 간판도 매우 우아하게 그려놓아서 고급 문예영화인가 싶었다. 사람들도 줄을 서서 입장하기에 꼭 봐야지 하다가, 어느 날 큰 기대를 품고 관람하게 되었다.

영화는 1900년대 초쯤 캠브리지 대학에 다니는 두 선후배 남학생의 우정과 사랑에 관한 내용이었다. 매우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배경과 음악, 두 배우의 연기력 등은 영화를 꽤나 좋아했던 필자로서는 싫어할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영화를 채 반도 못보고 나오고 말았다. 자막도 없는 독일어 더빙 영화라 내용을 제대로 이해 못한 면도 있었으나, 두 주인공의 관계가 우정을 벗어나 걷잡을 수 없는 사랑으로 치달아 너무 불편하고 불쾌해서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매우 유명한 영화라는 걸 알게 되었다.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 남우주연상, 음악상을 거머쥐었고, 두 주인공 중 하나는 세계적인 배우가 된 ‘휴 그란트’였으며, 이 영화의 감독도 필자가 매우 재미있게 본 영화인 ‘전망 좋은 방’, ‘남아있는 날들’을 연출한 ‘제레미 아이언스’였다. 그리고 이 영화의 원작자인 ‘E.M. 포스터’도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유명작가로 주요 작품으로는 ‘전망 좋은 방’, ‘하워즈 엔드’, ‘인도로 가는 길’이 있는데 대부분 영화화되었고, 모두 필자가 보았으며, 매우 좋아하는 장르의 소설과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 ‘모리스’는 왜 몰입이 안 되고 보는 내내 불편했던 걸까? 다시 보면 개봉 당시의 유럽 사람들 수준으로 공감하며 볼 수 있을까?

얼마 전 늦은 밤, 숙소에서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데 뜻밖에도 ‘모리스’를 상영하는 게 아닌가. ‘이젠 TV에서도 볼 수 있구나~’ 신기해하면서, 32년 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두 젊은 주인공의 ‘조금은 특이한 감정선’을 장년의 필자가 공감하기엔 아직도 깊은 간극이 있었으나, 예전과 같은 불편함은 많이 누그러진 듯했다. 그간 세태(世態)가 많이 바뀐 탓이리라.

최근 이태원발 코로나19의 2차 유행 조짐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4차에 이어 5차 감염자까지 나오면서 온 국민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그 중심에는 일부 부류, 즉 성소수자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4월말부터 5월초에 이어진 긴 연휴기간에 일단의 성소수자들에 의해 방역의 한 축이 뚫렸다며, 이들에 대한 비난의 여론이 들끓고 있다. ‘신천지’ 때도 마녀사냥 식으로 몰매를 가하니까 연락도 끊고 잠적한 신도가 수백수천 명이었다. 이들을 찾아내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는지 기억해 보자. 불과 두어 달 전의 일이다. 이번에도 특정 집단이라 언급하지 않고 이태원 무슨 클럽이나 주점을 언제 다녀간 사람이라고 지칭하며 차분하게 초동대처를 했으면 조기에 2차 유행을 차단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많다.

‘모리스’는 ‘E.M. 포스터’의 자전적 소설로, 작가의 요청에 의해 그의 사후에 출간되었다. 포스터도 살아생전에 ‘성소수자’라고 낙인찍히는 게 두려웠나 보다. 이처럼 동성애는 구미에서도 수십 년 전까지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미국에서도 1977년 성소수자 최초로 샌프란시스코의 시의원에 선출된 하비 밀크는 당선 1년 만에 암살되었고(이 또한 ‘숀 펜’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여러 정치인들도 성소수자로 밝혀지면 옷을 벗어야 했다.

이랬던 세태가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바뀌었다. 구미 정치인 중에는 성소수자임을 떳떳이 밝히고 활동하는 사람이 늘고 있고, 수상에 오른 이도 속속 나오고 있다. 부부가 동반하는 정상회담 자리에 버젓이 데리고 가기도 한다. 최근 미국 대선후보에도 성소수자가 나와 초반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번 코로나19로 그간 수면 아래에 은폐되거나 쉬쉬해 오던 여러 세태들이 수면 위로 속속 올라오고 있다. 불편하더라도 우리 사회에 내재된 여러 계층의 문제를 공감하도록 노력하고, 나아가 수용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어쨌거나 코로나19 이후의 우리의 삶은 이전과는 많이 다를 것 같다.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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