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그 해의 5·18
희미한 그 해의 5·18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5.17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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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8월, 부산 국제신문 편집국 기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사직서를 써야 했다. 정기 인사발령을 앞둔 정무직 공무원들처럼 ‘일신상의 이유’를 윗선의 지시대로 받아 적어야만 했던 것. 그 날이 ‘8월 15일’이었다는 필자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기자들은 공교롭게도 광복(光復) 기념일에 펜을 강제로 꺾인 채 해직(解職)의 긴 터널 속으로 쫓기듯 내몰려야 했다.

그 해 5월, 국제신문 사회부 소속 조갑제 차장(전 ‘말’지 편집장, 전 ‘월간조선’ 사장)이 신문사 몰래 광주로 숨어들었다. ‘타고난 기자’ 조갑제는 특별취재 요청이 간부진에게 보기 좋게 거절당하자 동생이 인턴 과정을 밟고 있던 대학병원에서 신병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핑계로 병가(病暇)신청서를 내고는 곧장 잠입취재에 들어갔다.

조 기자가 그 무렵 빛고을 광주의 소요 현장에서 발로 뛰며 취재 중이라는 사실은 동행한 후배 사진기자가 어렵사리 들고 온 기사를 눈으로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포연(砲煙) 내음 물씬한 ‘5·18 광주사태’의 생생한 현장증언은 그러나 빛을 보기도 전에 편집국장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갈가리 찢긴 채 편집국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만다. 기사가 온통 ‘계엄군(戒嚴軍)’이 아닌 ‘시민군(市民軍)’의 시각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입사동기였던 사진기자는 전남-경남 경계지점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던 계엄군의 살벌한 몸수색을 피하기 위해 기사원고와 현장사진을 몸속에 숨긴 채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죽을 고비를 넘기며 날랐노라고 후일담을 전한 바 있다. (당시의 기사용 원고지는 줄이나 칸이 없고 8절 갱지를 4등분한 백지로 손바닥만 크기였다.)

조갑제 기자가 보내온 발 냄새 가득한 기사들은 한동안 ‘광주사태’로 불렸던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생생한 기록물이었다. 전두환 군사쿠데타 주범의 계엄령 선포와 치밀한 보도 통제는 광주의 진실을 교묘하게 감추기에 바빴고, 국내 언론매체들은 ‘스스로 알아서 기는’ 관행에 길들여져 갔다. 특히 계엄군은 옛 부산시청(현 ‘롯데 몰’) 건물에서 기사의 ‘사전검열’로 지역 언론매체들의 숨통을 죄었고, 럭키그룹(LG그룹의 전신) 계열의 국제신문은 약 3개월 후 ‘찍 소리 한번 못 내고’ 신군부(新軍部) ‘언론 통폐합’ 작전의 고분고분한 희생양이 되고 만다. 해직기자들이 군홧발에 채이듯 강요된 낭인(浪人)의 세월 속으로 내쫓기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그 해 상반기는 나라 전체가 소요사태와 강력사건으로 얼룩진 시기였다. 그 해 4월 하순 강원도 정선군 사북면에서는 동원탄좌 소속 광부들의 격렬한 시위가 전국 소요의 봉홧불을 올렸고, 그 불빛은 곧바로 부산의 산업현장도 비추면서 동국제강·연합철강 노동자들의 연쇄파업 사태를 낳았다. 동명목재 강석진 사장 별장의 강도사건도, 필로폰계의 대부 이황순 체포 작전에 부산남부경찰서 전 직원이 나선 것도 다 그 무렵의 일이었다.

그러나 광주 취재 건으로 국제신문의 다른 기자들보다 두어 달 먼저 사직서를 써야 했던 조갑제 기자의 그 이후 변신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물음표로 남아있다. 일시나마 광주 시민군과 울분을 같이 나눴고 한동안 진보성향 ‘말’지에 몸담기도 했던 그가 왜, 무슨 이유로 박정희의 예찬자로, ‘극우논객’으로 비쳐졌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하지만 독실한 크리스찬인 그가 거짓을 싫어하는 정직한 인물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5·18 당시의 현장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특수군(일명 ‘광수’) 광주 투입설’을 주장하는 이들을 향해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아온 것이 이를 입증한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1980년 그 해의 5·18이, 희미한 기억의 곳간에서 되살아나곤 한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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