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살 인생 - 아홉 살 소년에게 배우는 사랑의 ‘바닥’
아홉살 인생 - 아홉 살 소년에게 배우는 사랑의 ‘바닥’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5.14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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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홉살 인생'의 한 장면.
영화 '아홉살 인생'의 한 장면.

 

<아홉살 인생>에서 이제 아홉 살 소년 여민(김석)의 삶은 나름 멋졌다. 산동네 초등학교 3학년인 여민은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대장’으로 통했다. 싸움을 제일 잘했는데 한 번은 친구들을 자주 괴롭혔던 5학년 형 ‘검은 제비’와도 붙어서 가볍게 제압하며 동네 평화를 지켜냈다.

속도 깊었는데 누나와 외롭게 살아가는 친구 기종(김명재)과 도시락을 나눠먹었고, 눈을 다친 어머니(정선경)에게 색안경을 사주고 싶어 몰래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며 돈을 모았었다. 공부도 잘했던 여민은 비록 집은 가난했지만 착하고 듬직한 아들이자 학교에선 주먹도 세고 의리도 넘쳤던 멋진 친구였다. 그렇게 그 때까지만 해도 여민에겐 세상 모든 것이 명료해보였다.

그런데 그 무렵, 서울에서 새침 도도한 소녀 우림(이세영)이 같은 반으로 전학을 오게 됐다. 그 동안 매일 봐왔던 친구 금복(나아현)과는 차원이 다른 미모의 우림으로 인해 여민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하필 짝지까지 되면서 난생 처음 느껴보는 묘한 설렘이 산동네 슈퍼히어로를 마구 흔들어놓았던 것. 동네 총각인 팔봉이형(최덕문)에게 조언을 구해보기도 하지만 별 도움이 안됐고, 결국 여민은 손 편지로 우림에게 마음을 전한다.

꽤 됐지만 한 라디오 고민상담프로에서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사가 성장과정에서 사랑을 꼭 해봐야 하는 이유에 대해 “사랑을 해보면 자신의 바닥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었더랬다.

당시 깊이 공감했었는데 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 건 사랑을 하게 되면 스스로를 상대방에게 다 까발려야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만 해도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하지만 그게 진심이고, 다들 척하는 세상에서 사랑이 위대한 까닭이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바닥’은 조금 다른 의미인데 둘이 잘 될 때야 서로 마음을 연다는 건 당연히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일 터. 하지만 사랑의 상처로 아플 때나 헤어질 때는 그 구름의 고도만큼이나 아래로 추락하게 된다.

그리고 추락한 그 지점이 바로 상담사가 말했던 ‘바닥’이다. 그렇다. 그 바닥이란 사실은 살면서 겪게 되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의미하지 않을까? 하늘로 붕 떠서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다시 떨어지는 건데 얼마나 아플까.

리차드 커티스 감독의 <러브 액츄얼리>에서 초등학생 샘(토마스 생스터)도 짝사랑하는 반 친구 때문에 괴로워하며 새아빠인 다니엘(리암 니슨)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딨어요?”

아무튼 추락한 그 지점에서 어른이라면 보통은 한 동안 술로 때우다 미치도록 보고 싶을 땐 밤늦게 전화해서 욕을 퍼붓기도 하고, 세상이 다 무너진 듯 우울증에 빠져 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나름 괜찮다. 누구나 겪는 일반적인 바닥이니까. 또 그러다 보면 새순이 돋듯 어느 새 다시 새 심장이 돋아다니 마련이다.

문제는 여기서 더 깊이 떨어져 아예 지하로 파묻혀버리는 사람이 가끔 있다는 것. 그러니까 상대방에게 해꼬지를 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바로 그러한데 <아홉살 인생>에서 팔봉이형이 그랬다. 같은 동네 피아노 선생을 사랑했던 그는 그녀와 사이가 멀어진 뒤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만다.

허나 여민은 달랐다. 우림에게 전한 손 편지는 그녀에 의해 담임선생님(안내상)에게 고자질당해 만천하에 공개되고 말았고, 급기야 우림으로 인해 여민은 돈을 훔쳤다는 누명까지 쓰게 된다. 아니 서울깍쟁이답게 우림의 톡톡 튀는 오만 짓거리에도 굴하지 않고 여민은 뚝심 있게 그녀를 지켜주려 애를 쓰는데 그 모습이 어린데도 참 멋지다. 여민이 괜히 산동네 슈퍼히어로가 아니었다. 마침내 그런 여민에게 우림도 숨겨 왔던 자신의 마음 속 깊은 바닥을 드러내 보이고, 둘은 평생 잊지 못할 첫사랑을 만든다. 가끔은 아이가 어른보다 낫다.

둘이 한참 알콩달콩 밀고 당기기를 하던 시절, 소풍을 갔다가 여민과 우림은 몰래 빠져나와 둘만의 산행 데이트를 즐기게 된다. 겨우 무릎 정도의 나뭇가지인데도 우림은 여자보고 그걸 뛰어 넘으라고 한다며 여민에게 앙탈을 부린다. 결국 길게 돌아서 오게 된 우림, 하지만 순간 그녀는 똥을 밟게 되고, 놀라서 아까 그 나뭇가지를 훌쩍 뛰어넘어 버린다. 그런 뒤 이번엔 똥 밟았다고 울면서 앙탈을 부리는데 그걸 지켜보던 여민이 시크하게 말한다.

“가시나 잘만 뛰어 넘네.” 그런 뒤 이번엔 똥 묻은 우림의 신발을 냇가에서 씻어준다. 아홉 살이든, 스물아홉 살이든 사랑은 참 어렵다. 그래도 여민의 입가엔 지금 웃음기가 그득하다.

2004년 8월 26일 개봉. 러닝타임 105분.

취재1부 이상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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