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파수꾼] 개개인의 참여에서 시작되는 산업안전
[안전파수꾼] 개개인의 참여에서 시작되는 산업안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5.14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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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지역과 제품창고 여기저기에 붙어있던 빨간색 X 표지가 뭔가요?” “뭘로 보셨습니까?” “무슨 안전표지로 보이는데 처음 보는 낯선 모양인데다 부착한 위치도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공장의 중요 고객사에서 방문한 날, 함께 생산현장을 둘러본 후 회의실로 돌아오면서 고객사 대표와 주고받은 대화다. 동행했던 고객사 직원들도 아주 궁금한 표정이었다. 하긴 흰색 바탕 A4용지 절반 크기에 굵은 빨간색 X 표시가 꽉 차 있는 표지가 포장지역과 냉장창고 구석구석 여기저기에 산만하게 나붙어 있으니 궁금할 수밖에. 더군다나 여러 개의 X 표지가 거의 같은 지점에 덕지덕지 붙어 있기도 하니 더더욱 이해하기 쉽지 않았으리라. 오래전 일이지만 당시에는 매달 한두 번씩 외부 손님들이 방문할 때마다 받는 질문이었다. 
해당 작업장에서는 개당 작게는 200Kg에서 크게는 500Kg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생산품을 주문사양에 따라 포장한 후 인접한 냉장창고에 2단 또는 3단으로 차곡차곡 쌓아둔다.  그리고서 출고일정에 맞춰 냉장창고에서 냉장트럭에 옮겨 싣는데, 완성된 포장물이 중량물인데다 제품의 특성상 작업장의 청결 유지가 필수적이라 2톤 전동지게차를 사용했었다. 그리고 사내교육 과정에 전동지게차 운전면허 과정을 운영하여 교대조 직원은 누구나 지게차를 운전할 수 있게 했다. 이는 작업의 효율성 측면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었지만 숙련도 측면에서 개개인간 차이로 인해 지게차 운전이 허용된 협소한 작업공간에서 지게차 포크에 의한 기물 손상 또는 건물구조물과의 충돌이 빈번하게 보고되는 시기였다. 사소한 사고일지라도 보고를 격려하는 사내 분위기였지만 횟수가 잦아지니 보고를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뭔가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들리기도 했다.
그즈음 4개 조 교대팀원 전체가 참석한 단체토론이 있었다. 반복되는 사고에 대해서는 사고보고와 조사절차를 단순화하면서 대신 시각적으로 사고지점을 알리는 표지를 사고를 낸 당사자가 부착하도록 하자는 의견이 긴 토론 끝에 채택되었다. 그리고서 곧바로 실행에 들어갔는데 선행조치로서 이미 보고되었던 사고지점들에 일괄적으로 X 표지를 부착한 후에 둘러보니 참 볼만했었다. 이렇게 시작된 X 표지는 한동안 시간의 흐름과 함께 늘어났다. 지게차가 다니는 작업장 여기저기에 산만하게 붙어 있는 X 표지, 심한 경우 거의 같은 지점에 덕지덕지 덧붙여진 표지들이 오히려 주의력을 산만하게 만든다고 불평하는 의견들이 산발적으로 제기되었지만 그 효과는 막연하게 기대했던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크건 작건 지게차를 운행하는 동안 발생하는 사고지점에 운전자 스스로가 빨간색 X 표지를 붙여서 동일 작업장에서 유사한 작업을 하는 동료들에게 경각심을 높여주는 자발적인 참여 프로그램의 힘이었으리라.
또 다른 사례를 보자. 당시 듀폰 울산공장에서는 국내 공장의 운전관행상 무척 생소했던 직원의 다기능화(MULTI SKILLS MULTI FUNCTIONS)를 도입하면서 교대운전팀에서 간단한 설비 이상까지 직접 해결하도록 하는 교대조의 정비역량 확보(SHIFT MAINTENANCE)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PRO-50으로 이름붙인 제안제도는 일반적인 개선제안과 달리 개선제안자가 직접 실행까지 하도록 제도적으로 장려했다. 물론 전문성이 요구되는 변경작업은 정비부서 또는 소관부서에서 수행해야 하지만 생산과, 기술과, 그리고 교대팀장들이 함께하는 심사를 거쳤다. 승인된 제안 중 현장에서 수행 가능한 범주로 분류되면 제안자가 소요자재, 도구 등을 지원받아 근무시간에 직접 하는 방식이었다. 교대팀은 9명으로 각자가 특정 공정을 운전했는데 팀원 중 일부는 전기정비, 기계정비 교육까지 받았고 교대팀장이 상황에 따라 전 팀원을 유연하게 배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이 제출한 개선제안을 근무시간 중에 팀 동료와 함께 스스로 실행해 보이는 건 번거로운 일이었을 텐데도 직원들은 이런 시도에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스스로 해보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회사의 인정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는 평이 다수였다. 그리고 실제 도면만으로는 찾아내기 어려운 구석구석의 불안전한 상태들이 그 현장을 운전하는 근무자들에 의해 운전자 친화적으로 개선됨으로써 생산현장의 안전수준을 자연스럽게 높일 수 있었다. 
직무만족도에 대한 조사를 보면 한결같이 지시를 받아서 수행하는 수동적인 역할보다는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역할에서 만족도가 매우 높게 나오고 있다. 경영학에서 구성원들의 동기부여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이론 중 하나인 ‘욕구단계론’을 통해 매슬로우는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싶어 하고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뜻을 실현하는 것을 추구한다고 했다. 이는 인간의 욕구는 계속 변하지만 속해있는 조직의 가치와 규범의 영향을 받게 되며,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해 보기를 원한다는 걸 시사한다. 안전제일을 강조하고 무재해사업장을 바라면서 계획한 안전 프로그램이 그럴듯해 보여도 일방적인 지시가 된다면 근로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직원들이 가진 역량과 의지를 인정하고 직원 스스로가 실천해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안전 프로그램에 최대한 반영시켜 전 직원이 참여하는 안전 프로그램의 모습을 보일 때 조직과 개인 모두가 만족하는 안전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사업장에서 실행하는 안전 프로그램의 최대 수혜자는 근로자인 나 자신임을 실감하고 사업장의 안전 프로그램과 현장의 불안전한 작업환경, 작업방법에 대해 관심을 높여보자. 그리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기꺼이 참여하고 또 실천한다면 하루하루가 자존감으로 충만한 생활이 되지 않겠는가.  

최준환 듀폰코리아(주) 이사, 아태지역 안전부문 전기안전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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