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순국 대학생 정임석 열사
4·19혁명 순국 대학생 정임석 열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5.12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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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이 일어나던 해에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북구 약수마을에서 농소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특별한 기억 하나가 바로 정임석 열사의 장례 행렬이다. 그 무렵에는 교실이 모자라서 2부제 수업을 했는데, 일찍 학교를 파하고 교문을 나섰다. 때마침 유별난 장례 행렬이 교문 앞을 지나고 있었다. 상여를 실은 차는 트럭이었고, 수백 명의 고등학생들이 뒤를 따르고 있어서 나도 그 행렬을 따라갔다. 운구차는 화정마을을 조금 지나 멈추고, 상여는 울산농고 학생들이 메고 동천을 건넜다. 나는 거기서 잠시 멈췄다가 집이 있는 약수로 돌아갔다.

1960년 봄, 그 무렵의 세상은 참 어수선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이 3·15 부정선거로 당선되었다는 것,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바닷가에 떠올랐다는 것 등으로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하는 시위가 날마다 일어났던 것이다.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들도 데모대의 중심이었다. 시골 지서에도 유리창이 깨지는 모습을 보았고, 부정선거 하부조직원 아무개의 집에도 돌이 날아들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데모대들이 농소중학교 학생들에게 시위 동참을 요구하는 장면을 기억하는 친구도 있다.

세월이 흘러 올해로 4·19혁명 60주년을 맞았다. 울산공고에 있는 정임석 열사 추모비 앞에서 당시 울산의 학생 시위 상황을 돌아보는 행사의 라이브 방송을 보았다. 울산노동역사관 배문석 사무국장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의 설명에서 나는 열사의 백형인 정반석이 쓴 <4·19에 바친 아우의 임종> 글에 주목했다. 이 글은 1960년 6월 20~21일 양일에 걸쳐 부산일보에 실렸다. 나는 기사 전부를 꼼꼼히 읽으면서 그때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민주화의 밑거름이 된 정임석 열사를 너무 홀대한 게 아닌가 하는 반성과 함께 그 내용을 정리한다.

열사는 1939년, 천곡 속심이마을에서 태어났다. 4남매 중 3남으로, 외가가 있는 호계 수동마을로 이사하여 농소초 25회, 농소중 2회를 졸업했으니 나의 고향 선배이다. 울산농림고(현 울산공고)를 18회로 졸업하고, 한양대 2학년에 재학 중 4월 19일 경무대(청와대) 앞에서 총탄에 쓰러져서 서울대병원에 입원, 6일 만인 25일에 순국했다. 당시 186명의 희생자 중 울산 출신으로는 유일하다. 가족들은 4월 23일 오후 7시경 ‘임석 위독 급히 상경’이라는 한 통의 속달 전보를 받으면서 긴박한 상황을 맞았다.

정 열사의 큰형은 24일 저녁이 다 돼 갈 무렵에야 서울행 중앙선 열차를 탔다. 계엄령으로 인해 상경할 차편이 없어서 속달 전보를 받은 지 하루를 넘기는 동안 열사의 어머니는 물론 큰형도 애를 얼마나 태웠는가가 글 속에 나타나 있다. ‘위독하다는 아우가 그 사이에 어떻게 될지, 병상에 누워서 애타게 부르는 어머님, 형님이라고 외치는 신음 소리가 귓전에 쟁쟁하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짐작이 간다. 25일 오전 7시 10분에 청량리역에서 내려 서울대병원에 도착, 8시 전후로 동생을 만나면서부터 5월 13일 장례식을 마치기까지의 상황을 요약해 본다.

「가느다란 목소리로 ‘형님’ 하고 부르는데, 분명 ‘임석’이다. 순간 살아있다는 환희가 가슴을 메운다. 그러나 다시 보니 중환자임이 분명하다. 그의 손목을 붙잡는 순간 두 눈에는 주먹 같은 눈물이 사정도 없이 뚝뚝 그의 뺨을 타고 흘렀다. ‘형님, 울지 마세요, 저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형님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14년간이나 애써 공부시켜 주신 노고에 보람도 없이……’ 나는 말문이 닫혀진 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겨우 ‘민주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훌륭한 아우를 가졌다는 것이 나의 일생을 통한 참된 기쁨’이라고 우선 위안을 시켰다.」

「그것도 잠시, 동생의 얼굴은 더욱 새파랗게 변해서 손목을 잡는 순간 ‘형님 갑니다. 하늘나라로…….’ 아, 그것이 절명이었다. 동생을 만난 지 약 한 시간만의 일이었다. 오후 4시경 화장이 끝난 후 유골을 안고 나올 때 가슴이 터지도록 울었다. 간신히 조그마한 여관방으로 안내받았는데, 밤이 깊어감에 따라 사방에서 군중의 아우성 소리가 천지를 뒤흔드는 것 같았다. 이윽고 날이 밝은 4월 26일, 거리는 인파, 또 인파로 메워졌다. 드디어 이박사가 하야한다는 성명이 거리의 스피커마다, 그리고 라디오마다 흘러나왔다.」

「그 뒷날인 4월 27일 낮에 울산역에 도착하였다. 목 놓아 우는 어머니, 그리고 유족들과 함께 울어주는 2만을 헤아리는 군중들……. 5월 13일, 60년 전의 오늘 아침에 울산군민장 영결식장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수많은 조문객들의 헌화와 이슬비 담뿍 맞은 여고생의 창자를 끊는 듯한 조사가 이어졌다. 빗속의 순금산 중턱 무덤 작업도 끝나고, 그의 행적을 천고에 전할 위령비도 건립되었다. ‘순국 대학생 오천 정임석 위령비’, 무덤 앞에 우뚝 솟은 위령비만이 민주제전에 붉은 선혈을 뿌린 내 아우의 행적을 천추만대에 길이 전하리.」

이정호 수필가·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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