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철 작가의 ‘책 한 권 드실래요?’ ] 한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강물처럼
[이기철 작가의 ‘책 한 권 드실래요?’ ] 한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강물처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4.27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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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최민식-휴먼 선집

달달하고 야들야들한 맛을 ‘살롱문화’라 부른다. 불쾌한 맛이나 냄새를 피하고 약물의 변질을 막기 위하여 표면에 당분을 입힌 알약인 당의정(糖衣錠)처럼 말이다. 오죽하면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가 주장한 문학의 쾌락적 요소는 유익한 교훈적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했던 당의정설(糖衣錠說)까지 아직 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가난은 죄로 취급되었고 가진 자만이 지상의 왕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들이 끝까지 숨기고 싶었던 것은 다름 아닌 ‘진실’과 마주치는 일이었다. 하지만 감출수록 더 드러난다는 평범한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그리고 그 진실을 추적하는 이들이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야수의 발톱을 드러내길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진실은 침몰하지 않았고, 화산처럼 폭발해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그런 사건들의 맨 앞줄은 반드시 한 사람의 희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70년대 말과 80년대를 통과하면서 느낀 것은 늘 회색 도시였다. 최루탄과 꽃병(화염병을 그렇게 불렀다)이 교차하던 시가(市街)는 앞을 분간하지 못할 미래가 펼쳐져 있었고, 두려움에 떨던 우리들은 고작 어깨 걸고 스크럼을 짜서 행진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암울했다. 옳고 그름은 오래전 알고 있었지만 요원해 보였던 그때, 시대를 읽으려고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오는 금서(禁書)라 낙인찍힌 책들을 읽었으며 소문의 근거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 가기 시작했고 비로소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은 신대륙의 발견과 같았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동기는 많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일. 흔히 인생의 선배 말이다. 지금도 그를 따르는 이들이 줄을 잇고 있는 한 사람, 사진작가 최민식.

생전 경성대학교(현재 부경대학교) 근처에 있던 선생님 댁을 자주 방문했다. 베토벤을 사랑했으며 방 안에는 수많은 책이 책장을 채우고 있었고, 한국 가수로는 서유석을 좋아했다.

도시 빈민층의 삶을 조망한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도 훗날 최민식 선생에게 사진을 배워 사진 전시회도 연 바 있다. 평생 리얼리즘을 구현한 대표자,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1호로 불렸던 최민식 선생. 2013년 2월 85세의 일기로 카메라를 내려놓기까지 만났던 인간의 모습은 어떻게 기억되고 기록되었을까?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거룩한 종교적 신념인냥 총대신 카메라를 메고 이 사회 구석구석에 앵글을 들이댔다.

한마디로 불편한 이미지, 그러나 그보다 생생할 수 없는 현장 한복판에 언제나 서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을 외면하지 않았던 작품들로 인해 때론 고초를 당했으나 단 한 차례도 손에서 카메라를 놓은 적이 없었다. 그는 애초 미술을 전공하려 했으나 길을 바꾸게 한 사건을 만난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던 때, 전 세계 사진작가 찍은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을 기록한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인간가족’ 그리고 아버지가 미술공부에 정진하라며 사준 밀레의 그림집. 이 두 권의 책이 그를 사진가의 길로 접어들게 만든다.

생전 부산 자갈치 시장 일대를 다니며 빈민(貧民)한 이들의 일상을 기록한 그는 ‘인간’ 시리즈 작품집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외된 이웃을 찍었고, 그들을 보듬은 사진의 특징은 기다리지 않았다는 점. 그는 피사체를 재빠르게 찍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찰나(刹那)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연출하지 않은 사진이야말로 진짜라고 강조했으며 일체의 트리밍(원화의 불필요한 부분을 임의로 잘라내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포토샵은 화장빨에 불과하니 사용하지 말라 강조했던 그.

오늘따라 빵모자를 쓰고 사파리 자켓에 낡은 청바지를 즐겨 입고 다녔던 선생님 모습이 더욱 그리운 것은 시대 탓인가? 아니면 넘치는 센티멘탈 혹은 멜랑콜리인가? 내일은 그가 걸었던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 상자 수리공을 만나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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