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와 ‘사대주의’
‘사대’와 ‘사대주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4.2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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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역사 문외한인 군인으로서 역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때 ‘우리 역사기록만으로 공부하면 바른 역사를 알 수 없다’고 가르쳐주신 이유립, 정명악 두 선생께서 ‘사대(事大)’와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대해 하신 말씀은 내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말씀의 진실은 내가 석·박사 학위를 받고 바른 역사 복원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수없이 확인되었다.

이유립 선생은 『대배달민족사』라는 역사책으로 알려진 분이어서 자세한 소개는 안 하겠지만, 이 말씀은 꼭 인용하고 싶다. “방편적 ‘사대’는 상황에 따른 대응책으로 필요할 때도 있지만, 고려 후기부터 나타난 의식적인 ‘사대주의’는 우리가 옛날부터 중국을 예(禮)로 섬겨왔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소중화(小中華)·오랑캐를 자처하며 역사를 인식하고 기록했다. 따라서 당시 우리나라 사서들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기술된 것이 많아서 우리 역사책만으로는 바른 역사를 알기 어렵다.”

정명악 선생은 ‘3·1 의거의 세계적 공헌’을 산책하면서 잠시 소개했지만, 내가 바른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고 사람을 찾아다니던 1980년대 초에 만난 잊혀지지 않는 기인(奇人)이셨다. 당시 아내와 함께 여러 번 찾아가 식사를 대접하면서 얘기를 들었는데, 그분의 말씀 중에 매우 인상 깊었던 것이 사대와 사대주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었다.

“사대는 누구나 살아남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자연의 이치다. 어린 학생들을 봐라. 공부 잘하는 작은 학생이 힘이 센 큰 학생의 가방을 들어주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힘센 큰 학생은 ‘저렇게 공부 잘하는 아이가 내 가방을 들어준다’며 자랑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은 주변 다른 친구들의 괴롭힘을 힘센 학생이 막아준다고 생각한다. 이는 서로가 생존을 위해 필요로 하는 상생의 수단 즉 ‘사대’다. 그러나 힘이 약한 학생이 스스로 힘센 학생에게 잘 보이려고 행동하는 것은 ‘사대주의’로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16년 전쯤 내가 읽고 상당히 공감했던 책이 『사다리 걷어차기』였다. 39세 때 경제부총리 후보에까지 올랐던 케임브리지대학 장하준 교수의 책이다. 이 책은 미국 등 선진국들이 자기들은 보호무역으로 선진국이 되어놓고도 후진국들이 보호무역을 하려고 하면 ‘무한경쟁의 자유무역을 해야 한다’면서 선진국이 못 되게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형상이라는 내용이다.

그 뒤 우리나라에 잠시 왔을 때 기자들이 “그런 주장이 옳다면 우리가 미국에게 그것을 강력히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작은 나라는 강대국이 기침만 해도 쓰러질 수 있기 때문에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면서 ‘이게 더 낫지 않아?’라는 등 상대의 반응을 보면서 주장의 강도를 조정해야 한다.” 외교가에서 알려진 대로, 미국 등 소위 ‘강대국’들은 합리적 논리가 아니라 자기네 국익만을 위해 약소국을 희생시키는 ‘깡패국가’인 것이 현실이다.

인간사회에서도 자연의 순리대로 상황에 따라 사대하는 것은 상생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힘이 약한 학생이 힘센 학생의 요구도 없는데 스스로 자신을 낮추면 조선왕조의 멸망처럼 자기궤멸의 길로 빠질 수 있다. 사대와 사대주의는 이렇게 차이가 있다.

바른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사대주의자들의 역사기록을 그대로 믿지 않고 그 전의 1차 사료를 확인해야 한다. 현재의 우리 강단사학자(講壇史學者)들은 이런 공부와 노력을 하지 않고 사대사학이나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연구를 벗어나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다.

박정학 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역사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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