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자 슈가맨의 겸손
시간여행자 슈가맨의 겸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4.19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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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1991년은 나에겐 의미 있는 한 해였다. 신임교수로 임용되던 해이기 때문이다. 그 땐 여유가 없어선가 이런 노래가 있었는지 기억에 없다. 당시 20대 젊은이들이 선호했던 감성적인 음악이어서일까.

“기약 없이 떠나버린 나의 사랑 리베카/ 조각처럼 남아있어 내 가슴속에/ 그리움도 원망도 아름답게 남았지만/ 너의 진실을 모르는 체 돌아설 수 없어/ …” 〔리베카, 양준일〕

이 노래는 그 당시 막 데뷔한 가수 양준일의 타이틀곡 ‘리베카’다.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을 정도로 멜로디가 매력적이다. ‘리베카’란 사랑하는 사람의 애칭이기도 하지만 고국 ‘한국’으로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 예언이라도 했는지 가사의 내용이 그의 라이프 스토리와 똑 같다. 그는 목소리보다 시대를 앞서간 댄서로 더욱 눈에 두드러진다. 30년 전 당시의 영상을 보면 세련된 패션 감각과 무대 매너는, 그 때의 가수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 과연 맞는지 의아해할 정도로 세련됐다.

초등 2년 때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미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들어와 데뷔한다. 재미교포 가수인 셈이다. 데뷔 당시 시대를 뛰어넘는 패션 센스, 지나친 미국식 퍼포먼스, 노래에 영어가사가 많고,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방송출연까지 정지당했다. 무대에 서면 돌멩이나 신발이 날아오기 일쑤였다. 하물며 출입국 직원은 외국인이 왜 한국사람 일자리를 빼앗느냐며 비자갱신을 가로막을 정도였다. 모국에서의 짧은 뮤지션 생활은 그렇게 비참하고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그로부터 30년 후 2019년 말, 우연히도 ‘시대’가 내버린 ‘그를’ 시대가 다시 불러들였다. 그해 12월 ‘슈가맨’이라는 방송프로에 처음 소환되어 기적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마이클 잭슨의 춤인 뉴 잭 스윙과 의상, 중절모, 긴 머리가 돋보였던 당시의 보기 드문 가수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지금 나이 쉰한 살의 슈가맨 양준일은 그의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가 폭발해 행복해 하는 모습이다.

최근 어느 방송 대담에서 앞으로의 계획과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저는 계획을 세우지 않아요’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저에게 꿈이 있다면 일상그대로의 ‘겸손한’ 아빠 ‘겸손한’ 남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소박하게 말한다. 가슴이 찡하다.

이솝우화의 한 장면을 보자. 사슴이 목이 말라 시냇가에 가 물속을 들여다본다. 물에 비쳐진 자기의 뿔이 너무 아름다워 감탄한다. ‘세상에서 나보다 더 멋진 짐승은 없을 거야!’라고. 그러나 물에 비쳐진 자기의 다리가 너무나 가늘고 초라해 열등의식에 사로잡힌다. 물을 먹는 순간, 사슴은 무서운 사자 울음소리에 놀라 삼십육계 도망친다. 한참 뛰다 그만 나무숲 가지에 뿔이 걸려 사자에게 잡아먹힌다.

사슴의 다리는 도망치는데 쓰였지만 으스대던 뿔은 나무에 걸려 죽음의 도구로 쓰인 것이다. ‘겸손과 교만’을 여실히 보여주는 한 예다.

꽃사슴같이 선하게 생긴 슈가맨의 얼굴을 보면 저절로 미소가 풍긴다. ‘진짜미소’를 잘 짓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에크만(P. Ekman, 1935-)은 진짜미소를 짓는 사람은 놀라운 긍정적 정서를 갖는다고 한다. 긍정적 정서는 삶의 시련을 잘 극복해주기 때문이다. 정말 그가 그런 것 같다. ‘초두효과’라는 말도 있다. 맨 처음 제시된 정보가 나중에 제시된 것보다 더 잘 기억되는 효과다. 그는 나이어린 방송 MC에게 허리를 깍듯이 숙여 인사한다. 초두효과가 좋은 겸손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삶에서 하루하루 ‘겸손’으로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지혜다. 낮은 위치에 있을 때 겸손한 모습이 되는 일은 쉽지만, 칭송을 받는 높은 자리에 있을 때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만이 겸손할 수 있다. 겸손이야말로 나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상대방을 더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김원호 울산대 명예교수, 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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