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不正)한 기억의 소환
부정(不正)한 기억의 소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4.19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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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살겠다, 갈아보자!” 4·15 총선을 코앞에 둔 3월 29일, 김종인 미래통합당 총괄선대위원장이 호기 있게 꺼내든 회심의 반전(反轉) 카드였다. 한 언론매체는 ‘64년 만의 소환’이란 제목을 달았다. 64년 전이면 제3대 정·부통령선거 시기인 1956년이었고, “못살겠다~”는 당시의 야당 민주당이 내걸었던 가슴 찡한 선거구호였다. 여당인 자유당은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다. 갈아봤자 별 수 없다”라는 구호로 맞장을 떴지만 민심은 싸늘했다.

소환 작업은 그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4·19혁명 제60주년 기념식 생중계 직전인 19일 오전, KBS는 <역사저널>의 기획물 <피의 일주일, 4·19부터 하야까지>를 다시 불러내 혁명 전후를 재조명했다. 이 기획물의 첫 방송은 4·15 총선을 2시간 앞둔 14일(화) 밤 10시쯤에 나갔다. 필자의 기억도 다시 소환한 것은 1960년 3·15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행돼 4·19혁명의 도화선으로 번졌던 ‘사상 최악’의 투·개표 수법들이었다.

‘스페셜타임스’가 맛보기를 제공한다. “정치깡패를 동원해서 회유와 협박을 하고, 사람들을 3명~5명씩 짝짓게 해서 공개투표를 지시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개표 현장에서도 거침없는 부정이 자행된다. 쌍가락지표, 피아노표 등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개표조작이 이뤄진다. 심지어 수면제를 탄 닭죽을 먹여 상대진영 관계자들을 재운 뒤 투표용지를 바꿔치기까지 하는데…”

또 다른 매체의 긴 글 ‘3·15 부정선거의 행태’ 9가지 역시 흥미롭다. ①사전투표=일정비율의 표를 미리 기표했다가 투표함에 넣는다. (‘4할 즉 40% 사전투표’란 말은 이때 선보인다.) ②야당 참관인 쫓아내기=시계를 조작하거나 핑계를 댄 다음 자유당 참관인이 야당 참관인을 몰아내고 그 사이 투표를 조작하고, 말을 안 들으면 납치·폭행도 불사한다. ③3·5·9인조 공개투표=선거에 익숙지 않은 유권자를 지도한다며 3~5~9인이 한 조를 이뤄 공개투표를 하게 한다. ④뇌물 살포 및 협박=사람에게 음식이나 물건을 대대적으로 뿌리고 이른바 ‘어깨’(정치깡패)를 동원해 유권자들을 협박한다. ⑤강령술(降靈術)=죽은 사람의 이름을 선거인명부에 올린다. (이사 간 사람의 이름도 명부에 올리는데, 이들의 표는 당연히 자유당 몫이 된다.) ⑥올빼미표=일부러 전깃불이 나가게 한 뒤 어둠을 틈타 개표통을 바꿔치기 한다. ⑦피아노표=이승만(자유당 대통령후보)을 찍지 않은 표를 미리 매수된 개표원이 떨어뜨리는 척하며 책상 아래로 들어가 양 손가락에 지장을 묻히고 피아노를 연주하듯 무효표로 만든다.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후보는 선거 얼마 전 타계했다.) ⑧쌍가락지표=반대표에 표시를 하나 더 해서 무효표로 만든다. ⑨샌드위치표=개표할 때 야당 표(장면 민주당 부통령후보 표) 뭉치 위아래에 여당 표(이기붕 자유당 부통령후보 표) 1장씩을 끼워 여당표로 집계한다.

역사저널 출연진은 ‘개표 부정 TOP3’로 피아노표와 쌍가락지표, 샌드위치표 셋을 지목했다. 더 놀라운 것은 투·개표 조작으로 너무 많아진 자유당후보의 득표율을 한참 줄이라는 하명을 윗선에서 내린 일이다. 소도 웃을 일이지만, 자유당후보의 득표율이 너무 높으면 금세 들통이 날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요즘 같은 대명천지에서는 꿈도 못 꿀 노림수지만 그 당시에는 통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기 마련. 이 일로 4·19혁명이 터졌고 당시 86세의 노욕(老慾) 독재자 이승만은 일주일 뒤 등 떠밀리듯 하야(下野)를 선언하고 하와이 망명길에 오른다. 집권 12년 만의 일이니 ‘권불십년(權不十年)’ 소리는 안 들어도 되는 것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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