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4.06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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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4월은 가혹했다. ‘제주 4·3사건, 4·19 학생혁명, 세월호 사고’ 등에 이어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세상이 온통 잿빛이다. 1920년의 ‘4월 참변’도 참 가혹했다. 백 년 전 4월 4일 밤, 일본군은 대대적 학살 작전을 감행했다. 연해주 신한촌을 기습하여 5천여 고려인들과 러시아인들을 학살하고, 한민학교와 한민보관 등 주요 건물들을 불태웠다. 누구보다도 고려인들의 페치카(난로)이자 대부였던 최재형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한 것은 큰 충격이었다. 이른바 ‘4월 참변’인데, 그해 10월의 간도 ‘경신참변’과 더불어 뼈아픈 역사이다. 

연해주는 원래 청나라 땅이었다. 러시아는 1860년에 연해주를 차지하면서 그토록 염원하던 부동항인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를 건설할 수 있었다. 러시아가 연해주로 진출한 바로 그 시기에 함경도 사람들도 연해주로 모여들었다. 러시아인들의 이주는 더뎠고, 한인들의 이주는 빨랐다. 1863년에 한인들은 연해주로 들어와 ‘지신허’에 마을을 이루었는데, 이주민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자 공간이 넓은 연추 방면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한반도의 3/4 정도이지만 강을 끼고 있는 평원이어서 경작 가능한 땅이 많아서 정착하기에 좋았던 것이다.

최재형(1860-1920)도 부모를 따라 연해주로 건너갔다. 함경도 경원에서 1869년에 이주한 그는 상선을 타고 세계를 도는 선장 부부를 만나는 행운이 따랐다. 그는 1871년부터 6년 동안 러시아어와 서양 학문을 익혔고, 세계를 돌면서 풍부한 학식과 큰 안목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했다. 상선이 수명을 다하자 17세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그는 능통한 러시아어와 견문으로 다양한 직종에서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특히 연해주 도로공사를 맡아 성공적으로 완공하여 1888년에 러시아 황제로부터 은급훈장을 받았다.

러시아는 연해주 개발에 이주 한인(고려인)들을 적극 활용했다. 1893년에 한인들의 러시아 국적 취득이 허용되자 한인 자치행정 조직인 도회소가 설치되었다. 최재형은 초대 도헌(책임자)으로서의 행정력과 포용력, 교육과 언론 등 모든 면에서 탁월했다. 고려인들은 조선의 전통과 예의범절을 지켰고, 서양식 학교와 함께 서당도 운영하였다.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통역, 도로 건설, 군납업 등을 통하여 연해주의 거부가 되었다. 한인들도 일자리와 가축, 채소, 연어 등의 납품을 통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최재형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한인 민족운동에 바쳤다. 마을마다 학교와 공원을 세웠고, 한인 자녀들의 상급학교 유학비를 지원했다. 당시 한인들의 가정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는 증언들은 그가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였음을 짐작케 한다. 동포의 권익뿐만 아니라 의병활동, 독립투쟁에도 크게 기여했다. 특히 무장투쟁의 기획과 자금원으로 활약했다. 자신의 안위는 물론이고 가족들의 희생도 컸다. 11남매의 자식들과 사위까지 모두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으나 대부분 비명횡사했고, 후손들은 강제이주열차를 타고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망국 전후의 연해주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에는 최재형이 우뚝하다. 1904년의 러일전쟁, 1905년의 을사조약, 1907년의 군대 해산, 고종 폐위 등 질곡의 정세 속에 의병장 유인석, 간도관리사 이범윤, 러시아공사 이범진과 그의 아들 이위종, 신채호, 이동휘, 홍범도 등 수많은 지사들이 연해주로 몰려들었다. 그들 대다수는 최재형의 지원을 받았고, 헤이그로 가기 위해 러시아에 온 이상설과 이준도 최재형의 집에서 머물다 떠났다. 의병들에게 의식주는 물론 무기까지 지원했고, 의병들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

최재형의 공식 이력이 그를 말해준다. 1895년부터 13년간의 연추 도헌, 의병운동 조직인 동의회 총장, 대동공보 사장, 대양보 사장, 권업회 총재, 러시아 귀화 한인회 회장, 1차 세계대전 러시아군 후원, 대한국민회의 외교부장, 상해임시정부 재무부장 추천 등이다. 이런 직임들을 맡으면서 일본제국의 끊임없는 모략과 위협을 받아야 했고, 일제의 압박을 받은 러시아로부터도 많은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그는 러시아 귀화 한인에다가 일찍이 사업에 성공하여 거부가 되었지만 안락을 취하지 않고 본인에게 주어지는 역할을 모두 떠안았던 것이다.

최재형의 인생역정은 참으로 위대했다. 박환 교수가 쓴 ≪시베리아 한인 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에 그의 행적들을 잘 담아내고 있다. 일제 부역자들 중에 삼한갑족들이 수두룩한 것에 비하면 천민의 자식이었던 최재형의 삶은 더욱 존귀하다. 침략자 이토를 저격한 하얼빈 의거에 안중근을 지원한 최재형이 있었다는 것도 반갑고 고맙다. 지난해에 최재형의 생가에 ‘기념관과 흉상’이 세워지고, 기념사업회도 생겨났다. 오늘 4월 7일은 최재형 순국 백주년 기념일인지라 무덤도 없이 산화한 선생께 크나큰 존경의 염을 담아 마음의 꽃 한 송이 올린다.

이정호 수필가·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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