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동박새의 짧은 사랑, 그리고 산화락(散華落)
벚꽃-동박새의 짧은 사랑, 그리고 산화락(散華落)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4.05 21: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매일 조류관찰대에서 여명을 기다린다. 지나치는 산책인들의 호주머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여러 곡 이어진다. 그 중에는 필자가 즐겨 듣고 부르는 진미령의 ‘미운 사랑’도 있다. 감정을 실어 불러보기도 한다. “남몰래 기다리다가 가슴만 태우는 사랑….” 벚꽃 몽우리들도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 노래다. 오늘도 함께 들었다. 삼월의 일상이다.

벚꽃봉오리는 손 없고 바람 없는 날을 가슴에 돌단을 쌓고 학수고대(鶴首苦待)했다. 그날이었다. 벚꽃이 꽃송이 버섯처럼 활짝 피었다. 그 소식은 샤프란 꽃향기를 품고 봄바람에 실려 사방에 전해졌다. 소문을 전해들은 동박새가 멧비둘기의 처량한 울음을 외면하고 기다렸다는 듯 찾아왔다. 동박새가 벚꽃 가까이 다가와 망설임 없이 선뜻 입을 맞추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벚꽃은 첫 입맞춤이었다. 당황한 벚꽃은 꽃잎을 오므렸다.

이윽고 벚꽃은 달팽이가 고개를 조심스레 내밀듯 꽃잎을 제치고 주위를 살폈다. 시선이 가는 곳마다 동박새가 찾아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입맞춤한 벚꽃은 새침한 나와는 달리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다. 벚꽃은 두어 번 심호흡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자 어느새 또 동박새가 다가와 입을 맞추었다. 벚꽃은 다짐했지만 어색했다. 반복되었지만 그때마다 입맞춤이 낯설어 몸 둘 바를 몰랐다. 눈은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만 수줍음만큼은 감추기가 어색한지 두 팔로 안을 수 없었다. 그저 까르르 간지럼 미소 꽃잎이 사방에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부끄러움에 홍조 띤 벚꽃을 본 수다쟁이 직박구리가 지나가면서 놀렸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즐거웠다. 꽃을 찾는 벌 나비 떼 향기를 좇아 날아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세월은 봄비를 동반하고 그렇게 흘렀다. 동박새들도 떠났다. 소문을 들었다. 동박새는 바람둥이라 했다. 동백꽃을 사랑했단다. 나에게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한마디 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추억만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마음을 추스르고 나직이 맘속으로 불러본다. “…그대 사라질 때까지 보네/ 한 번만 더 안아보고 싶었지/ 내 가슴이 익숙한 그대 /안녕이라 하지 않은 이유/ 그댄 알고 있나요….”(배웅·윤종신)

먼 하늘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손등에 주름진 꼬부랑 할머니가 다가와 말했다. “동박새가 꽃 찾아 가는 것, 자연의 섭리로 알고 있지!” 내게 반복해서 말할 때까지 난 그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할머니도 갔다. 벚꽃은 살며시 몸을 돌려 가슴에 손을 얹고 헤아려본다. 엄지, 검지, 약지를 차례로 오므렸다. 다시 왼손으로 옮겼다. 열손가락이 다 오므려졌다. 그러나 다시 펴지지 않았다. 동박새 품에 안겨 꽃잠을 잔 것이 고작 십일이었다. 꽃 인생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꽃은 열흘 이상 붉지 않는다)이라니, 무척 아쉬웠다.

문득 동네 할머니가 화전놀이 때 감정 실어 부르던 ‘애정(愛情) 아리랑’ 한 구절이 스쳤다. ‘임의 품에 꽃잠 잘 때 새벽닭이 홰를 친다. 뒷동산 살갈가지가 콱 잡아가면 좋겠네.’ 아쉬운 마음 그리 길지 못했다. 영동 할머니 바람의 시새움에 산화락(散花落=꽃잎이 바람에 날리어 사방으로 흩어져 떨어지는 모습)으로 흩날렸다. 까르르 간지럼 미소 꽃잎은 바람이 빗질하면 이러 저리 모여 아스팔트 거리마다 파스텔 복숭아꽃밭을 만들었다. 무정한 봄비에 꽃잎은 젖어도 동박새와의 입맞춤 추억은 내 가슴에 있다. 동박새와 입맞춤한 벚꽃은 모두 버찌를 잉태했다. 제법 좁쌀 크기로 자랐다. 이 모든 사연이 지난 삼월 말의 풍경이다.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꽃비’라 하고 ‘화우(花雨)’라고도 했다. 불교 의식에서는 산화락(散華落)이라 한다. 꽃비는 ‘꽃잎이 마치 비 오듯 한다’는 의미와 ‘꽃을 피우기 위해 내리는 비’라는 의미가 있다. 결혼식장에서 화동(花童)이 흩뿌리는 꽃도 꽃비이다.

화우의 대표 격은 배꽃잎 즉 ‘이화우(梨花雨)’일 것이다.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기생 매창은 배꽃이 흩날릴 때 임과 이별했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김소월은 진달래꽃을 통해 임과의 이별을 표현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서정주 역시 진달래 꽃비로 임을 귀촉도로 보냈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 리…”

불교 법화경(法華經) 서품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 ‘천우만다라화(天雨曼陀羅華)’의 비유를 찾을 수 있다. “그때 하늘에서는 만다라 꽃, 마하만다라 꽃, 만수사 꽃, 마하산수사 꽃을 부처와 모든 대중에게 흩어서 뿌렸다.” 불교 보살계 포살식에서 꽃을 흩어 뿌리는 산화게(散華偈) 내용을 찾을 수 있다. “흩뿌린 꽃은 시방의 장엄으로 두루 하며, 보배로운 꽃 휘장이 되며, 시방에 두루 한 모든 부처의 공양이 된다.” 인도 사회와 불교 의식에서 산화(散花) 혹은 산화(散華)는 설법 공간을 축하하는 의미를 나타내고 동시에 삿된 기운의 쫓음, 상대에 대한 존경심, 환영을 나타내는 예법이다. 결혼식에 화동(花童)이 앞서는 이유이다. 이미 사월이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조류생태학 박사·철새홍보관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