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용지 길이 51.9cm’
‘투표용지 길이 51.9cm’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3.29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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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국회의원을 뽑는 4·15총선의 투표용지 길이가 기어이 일을 낼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투표당일 유권자들이 받아 쥘 2가지 투표용지 가운데 비례대표 후보의 기호와 이름이 세로로 적힌 족자형 투표용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쨌거나 코로나19를 잘 방어해온 덕분에 신데렐라처럼 ‘의료선진국’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의 투표용지란 점에서 창피스러움이 앞선다. 투표용지의 길이는 그 나라 선거문화의 선·후진성과 맞물려 있다고 믿어온 선입견 탓인지 모른다. 한때 입후보자 선전을 동물그림으로 했다는 ‘동물의 왕국’ 아프리카의 투표용지라도 대하는 것 같아 꺼림칙하다.

선거관리당국의 공식 발표 이전이어서 정확한 치수는 아니지만 4·15총선 비례대표 후보 투표용지의 길이가 ‘총선 역사상 가장 긴’ 51.9cm로 보는 견해가 지금은 우세하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으로 급조 정당들까지 박치기하듯 비례대표 후보를 낸 데 따른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촘촘한 걸러내기 과정을 거쳐 매듭 지은 ‘비례대표 등록 현황’을 울산시선관위가 29일 공개했다. 그 결과 모두 35개 정당이 비례대표 후보를 냈고, 이 가운데 비례대표 후보만 낸 정당은 20개, 지역구 후보만 낸 정당은 6개로 집계됐다.

한데, 흥미로운 소식이 있다. 속인들로서는 ‘보도 듣도 못한’ 정당이 한 무더기는 된다는 사실이다. 코리아, 가자환경당, 국민참여신당, 깨어있는시민연대당, 남북통일당, 대한당, 대한민국당, 미래민주당, 여성의당, 우리당, 자영업당, 자유당, 새벽당, 자영업당, 충청의미래당, 홍익당…. 사족삼아 말하자면, ‘비례대표후보자 추천인수’가 20명이 넘는 민생당(21), 미래한국당(39), 더불어시민당(30), 정의당(20), 국민의당(29)이 한데 어울려 노는 물에 국가혁명배당금당(22)과 기독자유통일당(21)이 발을 같이 담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문제도 생겼다. 비례대표 후보를 낸 정당이 24개를 넘어 ‘투표지분류기’를 사용할 수가 없어 일일이 수작업을 해야 하는 손개표(수개표)를 피하지 못하게 된 일이다. 언론매체들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개표기가 등장한 이래 18년 만에 수개표 실시가 불가피해졌다고 난리들이다. 개표 결과 발표도 1시간을 훨씬 넘겨 2~3시간이 걸리게 됐다고 야단법석들이다. 19, 20대 총선 때 개표에 걸린 시간은 6시간 23분과 7시간 50분이었고, 총선 다음날 0시 23분과 오전 1시 50분쯤 개표 결과가 발표됐다.

이 때문에 죽어나는 쪽은 종이신문들이지 싶다. 보나마나 그 폐해는 ‘호외’라도 찍어내는 일조차 버거운 지방신문들이 고스란히 덮어쓸 공산이 짙다. 그래도 선관위 관계자는 할 말이 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각 시·도 선관위에서 지난 1, 2월에 수개표 모의연습을 여러 차례 해보았다는 것.

전문가들은 세계 정당사에서 유례없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 그 탓이 있다고 지적한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박원호 교수는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48개 정당이 난립한 70년 전, 1948년으로 시계를 되돌린 것 같다”고 말한다. 그나저나 물은 이미 엎질러지고 말았다. 그 후유증은 사전투표가 실시되는 4월 11~12일 하나둘씩 드러날지 모른다. 이날따라 해외토픽 감이 코로나19 사태 때문이 아니라 4·15총선 때문에 쏟아져 나올지 모른다.

그래도 박원호 교수는 점잖게 타이른다. “부작용을 막기 위한 선거법 개정 논의를 21대 국회에서 시작하라”고 말이다.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정당도, 국회도, 선거관리당국도 똑같이 가슴에 손을 얹어놓고 ‘통회자복’할 일이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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