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밑 아리에티 - 첫사랑에 관해
마루 밑 아리에티 - 첫사랑에 관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3.19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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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로 뒤덮인 글입니다.

'마루 밑 아리에티'의 한 장면.
'마루 밑 아리에티'의 한 장면.

소년은 아팠다. 심장 수술을 앞두고 있었던 소년은 여름방학을 맞아 요양 차 엄마가 자랐던 시골에서 일주일을 보내게 됐다. 그곳엔 외할머니가 아직 살고 있었다. 외할머니 차를 타고 시골집에 도착한 그날, 햇살은 곱게 빚은 소녀의 머리칼처럼 나뭇잎 사이를 파고들고 있었고, 심술궂게 생긴 살찐 고양이 한 마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허나 고양이는 소년을 본체만체했고, 앞마당 풀숲에 핀 작은 야생화 속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있길래 저럴까.’

궁금해진 소년은 야생화 가까이 다가갔다. 그 때였다. 잎사귀에 가려지긴 했지만 야생화 줄기를 타고 뭔가 재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는데 분명 인간의 움직임이었다. 게다가 갈색 머리에 베이지색 계열의 예쁜 원피스를 입은 아주 작은 소녀였다. 바로 소년과 소녀의 첫 만남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쇼우’였고, 소녀는 아리에티, 즉 ‘아리’였다. 이내 소녀는 소년의 시선을 피해 풀 숲 사이로 피해버렸고, 외할머니의 부름에 소년도 발길을 돌렸다.

소녀는 소인이었다. 다 커봐야 고작 10센티 정도? 그 세계에선 원래 인간과 소인들이 함께 살고 있었지만 인간들은 소인들을 만나기 어려웠다. 인간들에게 모습을 들켜 개체수가 점점 줄어들게 된 소인들은 그들의 눈을 피하게 됐고, 몰래몰래 인간들의 음식을 아주 조금씩 빌려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차피 인간들에겐 있으나마나 한 양이니. 참, 소녀는 아빠·엄마와 함께 소년의 외할머니집 마루 밑에 살고 있었다. 조그마한 보금자리였지만 세 식구가 살기엔 이만한 곳이 없었다.

그날도 소녀는 아빠와 함께 음식을 빌리러 소년의 외할머니집 주방으로 숨어 들어갔다. 오늘의 주된 목표는 엄마가 애타게 기다리는 설탕. 주방에서 각설탕 한 조각을 얻어 가방에 담은 소녀는 이제 티슈 한 장을 빌리기 위해 아빠와 함께 주방 옆에 위치한 소년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빠와 함께 티슈를 막 뽑으려는 순간, 소녀는 티슈 너머 거대한 눈동자와 마주하고 만다.

아직 잠들지 않은 소년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 티슈 뒤에 숨어 쿵쾅대는 심장을 주체할길 없는 소녀에게 소년이 말한다. “무서워하지 마.” 사실 소녀는 무섭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마루 밑 보금자리로 돌아 온 소녀, 원래 인간에게 발각되면 이사를 해야 하는 게 소인 세계의 불문율이었지만 소녀는 그날부터 소년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초점을 잃은 채 슬퍼 보이는 소년의 눈빛이 가장 신경 쓰였다. 그 무렵 소녀는 소년에게서 선물을 하나 받게 됐다.

티슈를 빌려가다 소년에게 들켰던 그날 밤, 놀란 소녀는 소년을 의식하다 가방 속에 뒀던 각설탕을 거대한 인간의 탁자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설탕을 기다리던 엄마는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 소녀는 소년이 마루 밑으로 통하는 지하 배수관 입구에 자신이 떨어뜨린 각설탕 한 조각을 놓고 가는 걸 보게 된다. 그리고 각설탕 아래에는 작은 쪽지가 놓여 있었는데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잃어버린 물건’

소년의 호의에 소녀는 결심한다. 소년에게 자기 가족을 내버려두라는 경고를 해야겠다고. 허나 실은 소년이 보고 싶었던 거다. 소년의 방 창가 커텐 뒤에 숨은 소녀는 개미들이 파먹다 남은 각설탕을 방 안으로 던져 돌려준 뒤 경고를 하지만 소년은 애타게 말한다. 가지 말라고. 그리고 모습을 보고 싶다고.

그 순간 소녀를 계속 노려왔던 까마귀가 창가로 달려들어 창문에 꽂히는 소란이 벌어지고 못돼 먹은 가정부가 소년의 방으로 들어온다.

그러자 소년은 행여나 소녀가 들킬까봐 급하게 한 손으로 소녀를 움켜진다. 그 손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그렇다고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소녀가 다칠까봐. 결국 소녀의 가족은 이사를 결심하게 되고 소녀는 작별인사를 위해 풀밭에 누운 소년의 귓가에 선다. 조심스러운 소년은 봐도 되냐고 물은 뒤 소녀를 처음 마주하며 말한다. “예쁘다.”

심장이 좋지 않은 소년이 수술을 앞두고 있다는 걸 소녀가 알게 된 그 때, 소녀의 엄마가 가정부에 의해 납치되고 소년은 눈물을 흘리는 소녀를 어깨에 태운 뒤 뛴다. 죽을 듯이 숨을 헐떡거리며. 그 순간 소녀는 생각한다. ‘이 사람, 날 좋아하는구나.’

마침내 엄마를 구한 소년과 소녀는 작별인사를 위해 다시 마주하게 되고 소녀가 먼저 말한다. “우리를 지켜줘서 고맙다”고. 그러자 소년이 말한다. “넌, 내 심장의 일부나 마찬가지야. 잊지 않을께. 영원히.” 틀림없는 사랑이었다. 첫사랑이었다.

2010년 9월 9일 개봉. 러닝타임 94분.

취재1부 이상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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