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철 작가의 ‘책 한 권 드실래요?’] 술 한 잔은 자신에게 보내는 연민이었다
[이기철 작가의 ‘책 한 권 드실래요?’] 술 한 잔은 자신에게 보내는 연민이었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3.16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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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변영로-명정 40년
술에 얽힌 이야기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주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일화들일 텐데 하지만 두말할 나위 없이 술은 선악이 공존하는 양면성을 가진 물질이다.

평생을 술 마신 일과 이를 반성하는 의미로 성당을 오가며 살았다는 프랑스 시인 폴 베르렌의 반복되는 후회는 술 앞에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한 단면을 보여 준 유명한 사건(?)으로 기억될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끊지 못하게 만드는 유혹은 어찌할 것인가?

1년 전인 2019년 3월, 영국의 ‘더 가디언’은 세계에서 가장 술 소비량이 많은 나라를 조사한 바 있다. 우리나라는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나마비아에 이어 5위를 차지했다. 얼마나 정확한 데이터로 이런 결과를 도출했는지 살짝 의문이 들긴 하지만 술고래들이 사는 대한민국임은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은 수없이 많다. 그중 하나.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과도한 음주 문화 줄이기 일환으로 ‘119운동’(한 곳의 술집에서, 한 종류의 술만 마시고 9시 이전에 귀가)까지 펼친 일도 있었다.

각설하고, 오늘의 책은 수필가이자 시인, 기자, 영문학자였던 한 사람의 육체 어록을 통해 글로 이루어진 술 이야기를 ‘술술’ 풀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수주(樹州) 변영로 작가(1898-1961). 그가 남긴 술 냄새 폴폴 풍기는 ‘명정(酩酊) 40년’.

명정(酩酊)이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한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맨정신으로는 살지 못해 술에 의지해 개인의 굴곡진 삶과 그 시대를 통과했다는 의미.

작가의 시대는 그랬었다. 세상 됨됨이가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살 수 없게 만든 운명적 시절, 식민시대를 통과했지만 해방 이후 나라의 모습과 서울이란 도시에서의 창백한 얼굴을 한 인테리겐챠(intelligentsia)들의 피폐함. 그 소용돌이 속에서 한 사람의 변방인으로 살았던 수주 변영로 선생이 들려주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 아니 페이소스(pathos)라 말함이 더 적절하겠다.

원제목은 ‘명정사십년 무류실태기’(酩酊 四年十年 無類失態記).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작품 대부분은 1949년에서 50년 사이 잡지 ‘신천지’와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난 시절 ‘민주신보’에 게재된 것이 전부다. 명정가(酩酊家)이면서도 풍자적, 해학적이며 기지가 넘치고 흐트러짐 없는 필치로 시대상을 조망하고 있는 점이 도드라져 보인다.

마치 찰리 채플린의 연기를 보는듯한 그의 명정기(酩酊記)는 자칫 본인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 보일듯한 아슬아슬한 사건들이지만 영리하게 그의 글에는 눈치채기 쉽지 않은 장치들을 여기저기 숨겨 놓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인의 일탈인 척하지만 행간에 숨겨둔 그가 사랑하는 나라와 주체할 수 없는 울분의 토로를, 개인적으로는 날마다 무너지고 있었지만 쓸 수 있을 때까지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펜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18년 잡지 ‘청춘’(靑春)에 영문 시 ‘Cosmos’를 발표해 천재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3·1 운동 때는 독립 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대주가(大酒家) 불렸던 변영로 선생. 삶 중 절반은 비극성을 띤 희극인으로 거닐다 생을 마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명정 40년’은 1953년 서울신문사에서 처음 발간된 이후 범우사에서 1977년 문고판으로 출판되어 두루 읽히다가 2018년 현재 5판 2쇄까지 발행됐다. 이 책에 대한 그리움 비슷한 추억을 가진 이들이 많을 것이다.

변영로 선생의 책을 섭렵한 뒤에도 아직 아쉽다면 오영수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한 권여선 작가의 알코올 냄새 진동하는 소설 ‘안녕 주정뱅이’나 산문집 ‘오늘 뭐 먹지?’ 등을 권한다.

그녀는 이러한 작품들의 연이은 출간 이유를 사람들의 고통이나 비극에 대해 옆에 앉아 있어 주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술이란 소재를 택했다고 말한 바 있다.

어떤가? 오늘도 시절이 하 수상하다는 이유로 술 한 잔이 땡기는지? 그럴지라도 당분간은 집에서 홀짝이는 ‘홈술’에 만족하길 바란다. 단골집 주모는 불경기에 속상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당부하는 바인데 술 이길 자신 없으면 아예 처음부터 잔을 들지 말기. 전봇대 붙잡고 울지 않기.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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