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남소희 기자 추모] 기사에 ‘마음’을 담은, 열정 넘쳤던 기자
[故 남소희 기자 추모] 기사에 ‘마음’을 담은, 열정 넘쳤던 기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2.20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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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故 남소희 기자 추모-
보도자료보다 발로 뛰는 기사 발굴
기자 천직이라던 밝고 똑똑한 동료
“남소희 기자님, 우리는 당신과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같은 부서 후배 하나가 퇴사를 앞두고 있어 회사분위기가 뒤숭숭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때마침 신입기자가 한 명 뽑혔지만 신입이 들어오면 데스크 입장에서 사실 마음 속은 늘 부담스러웠다. 처음부터 가르쳐야 하니. 아무리 똑똑하고 준비된 친구라 해도 업무가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최하 두 달 정도는 늘 걸리기 마련이다.

그건 새로 들어온 남소희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에서 통역 일을 하다 기자가 되고 싶어 지원을 하게 됐다는 소희도 처음에는 기사작성이 미숙해 애를 먹었었다. 다들 비슷했지만 수습 기간 소희가 작성했던 기사 역시 내 손을 거치면서 대폭 수정이 이뤄지게 됐다.

그런데 소희는 조금 남다른 구석이 하나 있었다. 하려고 하는 의지가 특히 강했다는 것. 그건 처음 입사하면 당연히 갖게 되는 군기 같은 것과는 많이 달랐는데 내가 단적으로 느꼈던 건 수습 받으면서 소희가 써온 기사들이었다.

당시 소희 기사에는 맥락 상 꼭 필요하지 않는 내용들이 자주 보였는데 기사를 봐주면서 그걸 쳐내는 게 내 일이었다. 가끔은 “이 부분이 왜 필요하냐?”는 식으로 잔소리도 했었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켠에서는 그게 예뻐 보였다. 제 딴에는 풍부하게 취재를 했고, 또 이것저것 관련 지식들을 다 찾아본 뒤 갖다 붙였던 것이었기 때문. 그러니까 기사에 ‘마음’을 담았던 거다.

그래도 자기가 써낸 기사들이 내 손을 거치면서 번번이 수정을 당하자 소희 역시 한 동안 풀이 죽어 있었다. 하지만 하려고 하는 의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친구가 나중에 실력발휘를 하게 될 거라는 건 의심치 않았다.

그런 내 예상은 점점 맞아갔는데 수습 딱지를 떼고 현장에 투입되자 소희는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사실 지역에서 특종이라 불릴만한 기사는 잘 없다. 다만 신문기자인 만큼 하루하루 면을 메워야 하는 부담감이 늘 따라다니는데 문제는 그 면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이다. 당연히 보도자료보다는 직접 발로 뛰어 발굴하는 기사들로 면을 메우는 게 중요하다.

물론 다른 기자들도 다들 잘했지만 소희는 거의 매일 하나씩 물고 왔던 것 같다. 어느 날은 같이 퇴근하면서 “집에 가면 뭐하냐?”고 물었더니 “기사거리 찾아야죠”라고까지 말했었다. 가장 신기했던 건 최근에 와서는 기사거리가 없을 땐 구청 예산서를 들여다보고는 남들이 안 쓰는 행정기사를 물고 오는 것이었다. 숫자로 도배가 된 복잡한 예산서를 들여다보는 건 연차가 많은 선배들에게도 까다로운 일이었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그걸 스스로 터득했던 거다.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지자 신나서 일하는 게 눈에 띌 정도였고, 그 무렵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기자 생활 재밌냐?”고 물었더니 “천직인 것 같습니다”라고 웃으며 말을 했었다.

허나 승부욕이 강해 더 잘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스스로를 자꾸 채찍질하다보니 혼자서는 나름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도 동료 기자들로부터 듣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런 소희가 며칠 전 서른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심정지로 세상을 떴다.

소희는 영화를 좋아했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삶이란 게 그런 거 같아요. 무언가를 계속 흘려보내는 것. 그래서 가장 가슴 아픈 건 작별인사를 못하는 거죠” 소희가 갈 때 우리도 작별인사를 못했다. 그래서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이 지면을 빌려 작별인사를 하려 한다. “남소희 기자님.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 본보 故 남소희 기자 영면의 길에 애독자 께서 보내주신 따뜻한 배려 잊지 않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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