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철 작가의 ‘책 한 권 드실래요?’ ]브런치(brunch)로 먹는 책 이야기
[이기철 작가의 ‘책 한 권 드실래요?’ ]브런치(brunch)로 먹는 책 이야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2.1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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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요나스 요나손 - 핵을 들고 도망친 101세 노인

‘브런치’란 말은 ‘아침과 점심 사이에 먹는 음식’, 그러니깐 아침밥도 아니고 점심도 아닌 어중간한 시간에 뭘 먹는다는 뜻이다.

이를 잘 표현해 주는 게 ‘아점’이다. 국립국어원에서 이 단어가 우리말을 심각하게 훼손시킬 위험이 있어 ‘어울참’이라고 순화시켜 사용해 보자고 제안한 바 있다. 아침 또는 일찍 먹는 점심을 가리키는 외래어 브런치(brunch)의 다듬은 말이라고 열을 올렸으나 동의하는 이들은 별로 없는 듯(현재 국어사전에는 등록이 되어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아주 낯선 우리 말이란 느낌적 느낌이다.

이를 놓칠 리 없는 IT 강국 한국 누리꾼들은 국립국어원 관계자를 한 방에 날려버렸다. ‘아점’으로 쓰자! 얼마나 귀에 쏙 들어오는 말인가. 아침도 아니고 점심도 아닌 어중간한 한 끼. 그런데 ‘아점’은 종종 ‘브런치’란 말로 우아를 떤다. 오후, 뭔가 속이 허전해 밀어 넣고 싶을 때 그것도 수다와 곁들인다면 안성맞춤이겠다 싶어 발전된 욕망이다.

말하자면, ‘아점’은 식구들 다 내보내고 모자란 잠을 채운 후 배를 퉁퉁거리며 일어나 ‘뭐 없나?’며 냉장고를 뒤져 남은 반찬을 주섬주섬 모아 밥 한 덩이와 찬들을 양푼이에 때려 넣고 비벼 먹는 ‘줌마렐라’들의 거룩한 한 끼다.

이에 반해 ‘브런치’는 오후 늦게 동네 이웃이나 친구들을 모아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세련되게 나온 음식들에 놀란 척하며 먹는 ‘캄푸라치’ 음식이다(불리하거나 부끄러운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꾸미는 행위로 프랑스어 ‘카무플라주’camouflage를 주부들이 영리하게 변용해 쓴다). 주부들의 위대한 수다 장소를 빛나게 할 뿐 아니라 완성 시키는 멋진 한 접시 되겠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엔 말 못 할 비극이 뒤따랐다. 카페에서도 빵을 파는 판이니 동네 빵집은 점점 더 밀려나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책이라는 것도 그렇다. 때론 가볍고 명랑한 내용이 담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을 소개하고 싶어 사설(私說)이 길어졌다. 편안하게 읽을 수 있으며 동시에 재미 만점인 한 권의 브런치로 ‘핵을 들고 도망친 101세 노인’(요나스 요나손, 열린책들, 2019)을 권한다. 2015년 국내에서 출간된 ‘창문 너머 도망친 1 00세 노인’(영화로도 나왔다)의 후속작으로 주인공이 나이 한 살 더 먹어 나타난 것이다. 전작 ‘100세 노인…’은 국내에서 70만 부 이상 팔렸다고.

늘 그렇지만 작가의 문자는 짧고 경쾌하다. 리듬감도 있으니 읽기에 편하다. 유쾌하고 일탈적인 ‘노땅’의 이야기.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작가의 4번째 소설인데 그의 작품의 특징은 적극적인 책 소비자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매력이 있다. 거기에다 주인공의 무한한 상상력은 독자들을 그 세계에 몰입하게 만든다.

잠시 현실의 일은 잊게 만드는. 우리에겐 요즘 그런 휴식도 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머리가 복잡할 때 ‘킬링타임’용으로 보는 영화처럼 말이다.

‘101세 노인…’의 수상한 일탈은 이번 작품에서 더욱 확장된다. 이번에는 북한이 등장한다. 핵무기 전문가라고 속이는 주인공 ‘알란’이 펼치는 경이로운 행각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큰 웃음을 선사한다.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살지 말라는 뜻은 아니지만 때로는 과감하게 타인이 시도하지 않은 일을 나만의 창의적이고 기발한 방법으로 내 삶을 책임지면 어떨까?

만약 그가 40대의 주인공이었으면 분명히 버림받았을 책이다. 그랬다면 아주 엉성한 버전의 007 시리즈물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점은 이 작품의 기특함. 주인공의 상상력과 돌출 행동을 통해 받는 보상(報償)에 있다. 때로는 삶에 지친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주인공 알란이 근심거리 가득한 친구 율리우스에게 건네는 말에서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 멀쩡하잖아? 기다려 보자. 다른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여러 시끄러운 일들이 마음 답답하게 하는 시절, 가끔 가벼운 책도 읽어보자. 인정?

다만 이 작품이 ‘’포레스트 검프’까지 떠 오르게 하는 걸작’이라는 다소 엉뚱한 평에는 동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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