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데믹’ 이전과 이후
‘판데믹’ 이전과 이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2.06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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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중엽의 일이다. 배경은 이탈리아 중부 피렌체 교외의 한 별장.

피렌체는 물론이고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는 대역병(大疫病)의 공포를 피해 7명의 숙녀와 3명의 품위 있는 신사가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2주간 체류하며 신을 경배하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한 열흘 동안 오후의 가장 더운 시간에 나무그늘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한 사람이 한 가지씩, 하루에 열 가지의 이야기를 하고는 헤어지기 전에 다음날의 주제를 정하고 저녁식사 후에는 노래를 부르고 잠자리에 들었다. 따라서 이야기의 수는 열흘간 100가지였으며, 내용과 형식은 다양하면서도 매일 정해준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어떤 사악한 고리대금업자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주 큰 속임수를 제대로 한번 부려보고 죽겠노라고 공언한다. 그리고 이름난 성직자를 불러 자신이 살아오면서 지은 죄를 낱낱이 고백한다. 성직자가 신성모독을 한 적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너무도 큰 죄를 지어 부끄럽다면서, 교회 바닥에 침을 뱉은 적이 한번 있다고 답하는 등, 자신을 미화한다. 고리대금업자의 결백성에 크게 감동한 성직자는 그가 죽은 후 그를 성자로 찬양하고, 실제로는 악인이었던 고리대금업자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와 축복을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프랑스의 한 부유한 상인이 자신의 친구인 야박한 유태인에게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하고, 그에게 교황청을 구경시킨다. 구경을 마치고 돌아온 유태인은 과연 기독교는 좋은 것이라며, 자기도 기독교도가 되겠다고 한다. 그런데, 유태인이 말하는 개종 사유는 기독교가 고매한 종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기독교계의 실상을 구경해보니 기독교의 성직자들이 온갖 나쁜 짓 즉 뇌물, 협잡, 매춘, 남색을 심하게 즐기는 것을 목격했는데, 그러면서도 기독교가 망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뜻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상은 첫째 날에 나온 처음 두 이야기의 줄거리다. 아마도 이 날은 성직자의 무지와 위선이 주제였던 것 같다. 이렇듯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풍자뿐 아니라 인간의 탐욕과 사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여러 화자의 관점에서 풀어낸 100가지 이야기가 나열된다. 이 작품이 다들 아는 이탈리아 작가 지오반니 보카치오가 1349 ∼1351년에 집필한 ‘데카메론’이다. 이 작품이 쓰인 시기는 1348부터 1351년 사이, 온 유럽을 흑사병이 휩쓸던 때였다.

외진 별장에 열 명의 남녀가 모인 것은, 당시 피렌체를 휩쓸던 흑사병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흑사병이 창궐하자 당시의 유럽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죽어나가는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 열 명의 남녀는 흑사병의 공포 앞에서 때로는 부질없는 삶에 대해 분노하기도 하고, 때로는 따뜻한 이야기로 서로를 감싸기도 했다.

당시에 유행한 흑사병으로 유럽 총인구의 절반 정도가 죽었다고 한다. 흑사병 이전의 세계 인구는 4억5천만 정도였는데, 14세기를 거치면서 3억5천만 정도가 되었다니 거의 1억 명이 줄어든 셈이다.

이때의 대역병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인류 최초이자 최대의 ‘판데믹(pandemic)’이다. 판데믹이란 세계보건기구(WHO)의 전염병 경보단계 중 최고의 위험등급으로,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14세기 흑사병 이후, 판데믹이라 볼 수 있는 것으로는 1918년의 스페인독감(사망자 약 2천~5천만 명 추정), 1957년의 아시아독감(사망자 약 100만 명 추정), 1968년의 홍콩독감(사망자 약 80만 명 추정)을 꼽을 수 있다.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개인의 위생 개념도 크게 향상된 21세기에 들어서도, 2009년 6월의 ‘신종 플루’로 불린 인플루엔자의 유행에 대해 세계보건기구는 판데믹을 선언한 바 있다. 그리고 약 10년 만에 중국 우한에서 발현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중국을 넘어 순식간에 전 세계로 번지자 이 기구는 또다시 판데믹을 선언했다.

의학의 발달로 예전같이 수십만에서 수천만 명씩 사망하는 끔찍함은 없겠지만, 교통의 발달과 도시 집중화의 영향으로 전염병의 전파 속도는 예측이 불가할 정도로 빠르다. 우한 코로나바이러스도 작년 12월 초에 처음 보고되고 두 달이 안 지나 전 세계 30개국 가까이에 전파되었다.

14세기에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당시의 종교와 문화, 사회 시스템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다. 모든 지식의 주관자로 자처해 온 성직자들이 사람들을 교회에 모아 기도와 신앙고백을 통해 병을 고치고 사람들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려 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치명적이었다. 이후 중세 봉건사회는 무너지고, 개인의 자유와 본능을 중시하는 르네상스 시대로 급격히 넘어가게 된다.

우한에서 귀국한 교민들이 아산, 진천 등지에서 2주간 격리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이 처한 환경과 상황이 어떨까 생각하다 오랜만에 책장에서 데카메론을 꺼내 보면서 여러 상상을 해보았다. 21세기 들어 연이어 발생한 대역병은 앞으로 지구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자못 궁금해진다.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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