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부장들 - 권력, 고름
남산의 부장들 - 권력, 고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1.30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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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산의 부장들' 한 장면.
영화 '남산의 부장들' 한 장면.

 

어른이 되어서는 잘 겪지 못하고 있는데 어렸을 땐 넘어져서 다치거나 해서 상처가 곪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꼭 상처가 아니더라도 엄지발가락 발톱 주변이 꽉 끼는 신발로 인해 상처 없이 그냥 곪아 버리기도 했었다. 아무튼 곪으면 색이 누렇게 변하는 건 고름이 생기기 때문이었는데 상처가 나으려면 반드시 고름을 짜내야 했다.

헌데 독특하게도 난 고름 짜는 일이 즐거웠다. 바늘로 찌르거나 상처에 생긴 딱지를 살짝 벗겨 내면 노란 고름이 튀어나오는데 그게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또 왠지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무튼 곪았을 때 고름을 빼는 일은 필수. 굳이 바늘로 찌르거나 하는 등의 인위적인 노력 없이 가만히 둬도 고름은 언젠가 반드시 터지기 마련이다. 고름으로 가득 차게 되면 그 부위가 말랑말랑해져서 약간의 충격으로도 결국은 터져버리기 때문이다.

우민호 감독의 신작 <남산의 부장들>을 보는 내내 어릴 적 가끔 짜냈던 고름이 떠올랐던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조선 시대 왕도 아니고 자그마치 18년 간 이어진 박정희 군사 정권의 끄트머리는 마치 권력에 생긴 고름 같은 느낌이었던 것. 해서 1979년 10월26일 저녁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를 향해 날린 총알은 마치 고름으로 덮인 부위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김재규를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대자연엔 자정작용(自淨作用)이라는 게 있고, 곪은 상처는 언젠가는 터지기 마련. 그러니까 그건 그냥 역사의 자연스런 흐름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실제로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김재규라는 사람이 자신의 주군인 박정희를 총으로 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중심으로 그려나가는데 그런 면에서 똑같이 10·26사태를 소재로 좀 더 일찍 만들어진 임상수 감독의 <그때그사람들>과는 많이 달랐다. 2004년에 개봉한 <그때그사람들>이 10·26사태가 벌어진 당일 총격 사건을 중심으로 담담하게 그렸다면 이번 <남산의 부장들>은 10·26사태가 벌어지기 40일 전부터 이야기가 시작돼 김재규가 왜 박정희를 쏘게 됐는지의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좀 더 담대하게 말을 하자면 개인적으로 천만을 넘길 것 같은 이 영화는 분명 김재규라는 인물에 대한 재평가의 신호탄이 될 것 같기도 했다. 뭐. 아님 말고.

아무튼 영화에도 나오지만 10·26사태가 벌어지기 40여일 전 김재규는 박정희의 명을 받들어 미국으로 건너가 전직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을 만난다. 김형욱은 유신헌법의 국회통과에 지대한 역할을 했지만 과도한 폭력과 고문으로 구설에 오르면서 박정희로부터 팽당한 인물이었다. 그 일로 악심을 품은 그는 미국 의회에서 유신정권의 민낯을 까발리기 시작했고, 회고록까지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김재규는 회고록 출간을 말리기 위해 원고를 회수하는데 영화 속에서 김형욱이 출간하려 했던 회고록의 제목은 바로 ‘혁명의 배신자’였다. 실제로도 제목이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형욱이 지목한 배신자는 바로 박정희였고, 박정희를 배신자로 몰아붙인 건 권력유지에 대한 그의 끝없는 욕심 때문이었다.

그런 시각은 김재규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부마항쟁(유신독재에 반기를 들며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민주항쟁)을 직접 시찰하면서 읽은 민심과 유신정권의 종말을 원하는 미국의 압력, 또 대통령 경호실장인 차지철과의 갈등 속에서 1979년 10월26일 오후 7시40분께 궁정동 안가에서 있었던 연회 도중 “각하 이제 그만 하야하십시요!”라고 외친 뒤 박정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스위스 역사학자인 ‘부르크하르트’가 말했다. “권력은 누가 행사하든 그 자체만으로도 악”이라고. 하지만 인간사에서 질서를 위한 통치는 반드시 필요한 법. 해서 권력은 ‘필요악’일 수밖에 없다.

대신 그런 만큼 권력은 ‘갖는 게’ 아니라 ‘운반하는 게’ 아닐까.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도 골룸(앤디 서키스)은 “My Precious!(나의 보물!)”를 외치며 절대반지(절대권력)를 가지려고만 하다 결국 절대반지와 함께 뜨거운 용암 속에서 파멸을 맞게 된다.

반면 주인공 프로도(일라이저 우드)는 영화 속에서 ‘반지운반자’로 불렸다. 그는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절대반지를 모르도르의 용암까지 갖고 간 운반자였던 것. 아무튼 박정희의 최후가 그랬던 건 그 역시 절대반지를 영원히 가지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실 혁명은 아래(국민)에서 위(권력층)로 향하는 것이다. 해서 5·16은 분명 쿠데타고, 박정희를 저격한 김재규의 행위 역시 일종의 쿠데타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정희를 사살한 죄로 재판대에 선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한다. “금번 10월26일의 혁명은 이 나라의 건국 이념이고, 국시이고, 6.25를 통해 전 국민이 수난을 겪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다치면서 지켜온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혁명을 한 것입니다”

2020년 1월 22일 개봉. 러닝타임 114분.

취재1부 이상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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