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망지추(存亡之秋)’의 각오
‘존망지추(存亡之秋)’의 각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1.29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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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초만 해도 공포영화의 소재는 다양했다. 서양 영화는 드라큐라 백작과 같은 흡혈귀, 나이트메어, 프랑켄슈타인 등이 주류를 이뤘고, 아시아권에서는 홍콩 영화의 강시나 일본 영화의 착신아리나 주온이 대표적이었다. 한국 영화는 처녀귀신이나 학원귀신이 주요 소재였다. 언제부턴가 서양 공포영화의 소재가 좀비로 정형화되더니 최근에는 많은 좀비영화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심지어 한국 영화에도 등장하여 관객몰이에 성공할 정도로 좀비가 사회적 트렌드가 돼가고 있는 듯하다. 할로윈데이의 가장 인기 있는 분장도 좀비라고 하지 않던가.

좀비(Zombie)의 사전적 의미는 ‘부활한 시체’로서, 아이티를 비롯한 카리브해의 몇몇 나라에서 믿는 ‘부두교’에서 유래했다. 부두교라는 것은 아프리카 콩고 등에서 유입된 흑인노예를 따라 아이티 등으로 전래된 아프리카 토속신앙에 그 뿌리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두교 사제인 보커(bokor)가 주술이나 약물로 인간에게서 영혼을 뽑아낸 존재가 좀비다. 좀비가 되면 보커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며, 보커는 이 좀비를 노동자로 착취하거나 노예로 팔아버리기도 한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서양의 전통 소재인 흡혈귀가 더해져서 현재 영화 속에서 자주 보는 그런 존재로 탈바꿈했다.

뜬금없이 좀비 타령을 하는 이유는 얼마 전 충격적인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자금 차입이 필요할 때가 있다. 경영안정자금부터 각종 자재비, 분담금, 세금, 보험료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자금 수요가 많다. 그런데 매출이 줄거나 수입이 지연되면, 우선 중소기업진흥공단이나 기술보증기금 같은 정부기관에 자금을 요청한다. 대출 및 상환조건이 가장 좋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대출받기도 무척 어렵다. 그래서 차선책이 제1금융기관인데, 여기서는 가차 없이 기업의 재무상태와 신용도만으로 대출을 심사하기 때문에 그 조건을 만족시키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다. 그래서 차차선책이 제2금융권인데, 이 기관들은 무조건 담보가 있어야 대출이 가능하다. 그나마 담보도 없으면 제3금융기관, 즉 사채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 정도 되면 거의 막장 수준으로 전락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금융실명제 등으로 모든 금융거래가 기록에 남는다. 만일 제2금융권 이하의 거래실적이 있으면 신용등급이 크게 하락되어, 차후 제1금융권에서의 대출 자체가 막혀버린다. 필자도 중소기업을 십여 년간 운영하면서 신용도 최우수 등급에서 바닥 등급까지 다 겪어봤다. 최우수 등급일 때는 제1금융기관에서 찾아와 “자금 차입 없이 어떻게 기업을 운영하냐?”면서 “초저금리로 자금을 가져다 쓰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바닥 등급에 떨어지면 초저금리를 제2 혹은 제3금융권 금리 수준으로 마구 올리고, 그것도 모자라 매일같이 “원금을 상환하라”고 협박한 적도 있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많이 안정화되면서 각종 지표도 호전되어 오랜만에 제1금융권을 노크해봤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우리 회사가 ‘좀비기업’이라는 거다. 업체 경력은 오래됐으나 그간 성장성이 저조하고 제2금융권 이하의 대출실적이 있다는 것이 이유다. 즉, 죽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살아난 것도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이 말을 듣는 순간 분심(憤心)이 솟구치는데, 아무리 삭히려 해도 좀처럼 삭혀지지가 않았다. “아니 ‘좀비’라니!”

2020년은 존망지추(存亡之秋)의 각오(覺悟)로 혼신을 다해서 좀비 딱지를 털어내야겠다. 예전처럼 금융권에서 다시 찾아와서 구걸하도록 해야겠다.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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