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의 세월, 고려인 강제이주사
유랑의 세월, 고려인 강제이주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1.27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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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이주열차에서 살아남은 이주민들의 겨울은 혹독했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고려인들은 언덕 아래 모래벌판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들은 추위와 바람을 피하기 위해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역에서 조금 떨어진 바슈토베 언덕 밑에 토굴을 파고 갈대를 잘라 와서 바닥에 깔았다. 바람의 유입을 막기 위해 입구를 최소화하고는 서로 체온을 나누면서 한 토굴에 두세 가족이 살았다. 밖에 나와 옷을 털면 이가 뚜두둑 떨어졌다. 그들은 함경도와 연해주의 추위에 단련되어 있었지만 영하 40도나 되는 생애 최악의 긴 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우슈토베역에서 내린 고려인 중 다수는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중앙아시아는 400여 만㎢가 넘는 광활한 지역이고, 사막지대와 황무지여서 낮이면 덥다가도 밤이면 춥다. 강제로 이주당한 18만여 명 중 만 명 이상이 아비규환의 이동과정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고, 정착 첫해에 기아와 더위, 추위 등으로 또 만 명 가량이 죽었다. 현재 ‘구소련’ 내 고려인이 약 50만 명인데, 우즈베키스탄에 18만여 명, 러시아에 11만여 명, 카자흐스탄에 8만여 명이고, 그 외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 13개국에 분포하고 있으니 당시의 분산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조상은 원래 함경도 사람들이다. 대개 억척스럽고 우직하다 하여 그들을 ‘돌밭 가는 소(石田牛耕)’에 비유한다. 자주 겪은 기근과 빈농의 처지, 정치적 억압 등 고난을 겪으면서 강인함이 길러진 것이다. 1863년경부터 연해주로 넘어간 그들은 독립운동가도 합류하면서 곳곳에 고려인 마을이 생겨났다. 그러나 연해주 고려인 사회는 러일전쟁(1904), 1차세계대전(1916), 볼세비키혁명(1917), 러·일의 역학관계에 따라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이런 처지의 원동(연해주)지역 ‘까레이스끼’들이 스탈린에 의해 다시 유랑의 길에 오른 것이다.중앙아시아는 130여 다민족이 살고 있었다. 엄청난 땅을 차지하고 있는 카자흐와 인구 밀집도가 높은 우즈베크가 중심 국가이다. 그곳 사람들은 페르시아와 그리스 문화 시대를 지나 슬라브족과 스키타이족이 혼재하면서 유목민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숙청의 칼바람은 멈추었지만 그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우리말을 못 쓰게 하고, 러시아어를 강요했다. 민족학교도 폐쇄되고, 정계나 공직 진출에도 제한받았다. 고려인에 대한 감시와 차별은 1953년에 스탈린이 죽고 나서야 중단되었다.

이런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고려인들은 울지 않았다. 나라 잃고 떠도는 망국노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이들은 협력하여 관개시설을 설치하고,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이주 첫해인 1938년 말에 카자흐에는 57개, 우즈베크에는 48개의 집단농장(콜호즈)을 건설했다. 새로운 희망으로 간난을 극복한 고려인들의 의지가 ‘콜호즈’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카자흐의 ‘아방가르드 콜호즈’와 우즈베크의 ‘북극성 콜호즈’는 설립 초기부터 경이적인 벼농사 성공사례를 남겼다. ‘디아스포라’, 유랑의 고려인들만이 가능한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주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들만의 삶의 방식을 회복하였다. 그들은 집보다 먼저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러시아어를 강요받았지만 ‘동족여천(同族如天)’, 동포애가 타 민족들과 달랐고, 교육에 대한 신념도 남달랐다. 연해주의 고려사범대학을 카자흐 ‘크질오르다’에서 다시 개교했고, 고려극장도 열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후는 물론 언어, 문화, 사회경제 등 전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 했다. 고려인들은 생존을 위한 각고의 삶을 이어가면서도 최소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말, 풍습, 음식, 노래 등 그들의 전통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고려인들에게는 두 개의 큰 별이 있었다. 숙청을 면하고 함께 이주한 홍범도(1868-1943)와 계봉우(1880-1959), 두 분을 가리킨다. 홍범도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전설이고, 계봉우는 역사학자이자 시베리아 등지에서 활동한 항일 운동가이다. 백마 탄 장군 김경천(1888-1942)은 일시 가족이 있는 중앙아시아로 돌아왔으나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누구보다도 연해주의 독립운동 대부는 최재형(1860-1920)이다. 일찍이 거부가 된 그는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 부었고,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가능케 한 인물이다.

부평초 같은 고려인들의 유랑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1991년 말에 소련이 붕괴되면서 독립국가가 된 중앙아시아 각국의 민족주의가 고려인들의 정체성을 흔든 것이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매우 우수하고 전문직 비율도 꽤 높다. 강제징용자 후손인 사할린 동포들도 고려인 범주 안에 있다. 대한민국의 성장으로 고려인들의 고국 정착 희망자들이 늘어났다. 현재 경기도 안산시와 광주 월곡동에는 고려인 수천 명이 모여 사는 집단촌이 생겨났다. 긴 유랑을 끝내고자 하는 전국의 약 10만여 명 고려인들이 국적 회복이 되도록 당국은 도와야 한다.

이정호 수필가·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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