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화 현상에 대한 우려
동일화 현상에 대한 우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1.12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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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연극평론가 구히서(본명 구희서, 1939 ∼2019) 선생이 세수 80으로 납월(臘月=음력섣달) 31일 별세하셨다. 평생을 연극계에 몸담았던 선생은 연극비평을 개척한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무용, 전통예술에도 애정을 갖고 글을 썼던 선생은 ‘한국 공연예술계의 대모(代母)’라 불렸다. 고인은 전통예술과 무용에 대한 애정도 각별해 ‘한국의 명무’, ‘무대 위의 얼굴’, ‘춤과 그 사람’ 등을 출간했다.

선생의 이름을 따서 1996년에 창설된 ‘히서연극상’은 연극평론가 구희서씨가 연극계에 기여한 정도와 작품성과를 기준으로 수상자를 선정한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학춤으로는 한성준, 한영숙, 이흥구의 계보로 전달되고 있는 학춤과 국립국악원에서 궁중정재로 살려낸 학춤이 있고, 김동원에 의해 전승되고 있는 동래야유에서 나온 학춤이 있으며, 양산사찰학춤으로 불리는 김덕명의 학춤이 알려져 있다. 이들 전승되고 있는 각종 학춤을 보면 한성준류의 학춤이나 동래야유의 김동원이 추는 학춤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궁중정재의 학춤과 양산학춤은 그러지 않은 상태다.

한성준, 한영숙 계보로 이어져온 학춤은 현재 그 전승의 맥을 잇는 이흥구가 국악원에 재직하면서 궁중정재의 여러 가지 춤을 재발굴해서 다시 살려내는 일에 참여해온 관계로 한성준, 한영숙으로 이어져온 학춤의 특색이 퇴색하고 궁중정재의 모습을 닮아가 거의 같은 모양이 되어가고 있다. 한영숙 선생은 생전에 이 점을 우려하면서 복식과 무보가 전해지고 있는 궁중정재는 궁중정재대로 전승이 되어야 하고 문화재로 지정된 자신의 학춤은 한성준 선생의 법도대로 전해져야 한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동일화 현상을 우려했었다.

그가 전승해서 추었고 그래서 지정을 받은 학춤은 한성준 선생이 궁중정재의 학춤에서 영감을 받았겠지만 복식을 개량하고 학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좀 더 자유롭게 춤사위를 만들어서 추어온 것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우려였다. 이 점은 현재 이 춤을 배워서 추는 사람이나 구경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눈에도 별로 뚜렷하게 걸리는 데가 없이 무심코 넘기는 것들이다. 그러나 복식에서도 다른 점이 있다. 학의 탈을 쓰고 춘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학의 다리가 한성준류는 검정양말이고 궁중정재는 흰색바탕에 짙은 갈색 가로줄무늬가 있는 다리싸개(현재는 양말)다. 또 춤사위는 원칙은 비슷하지만 한성준류가 훨씬 자유롭게 발전된 것이고 궁중정재는 정중한 법도대로 추어야 한다는 것은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다.

한성준류의 학춤과 궁중정재의 학춤은 분명히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줄기의 춤이라는 점 때문에 서로 뒤섞여 각각 그 특색을 잃을 염려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춤들은 서로의 특색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은 위의 학춤 두 가지가 서로 비교되듯이 서로 비교해볼 수 있는 춤이다. 우선 이 춤들은 모두 학을 주제로 내세운 춤이고 그 복식은 흰색 바지저고리 행전 도포에 검은 갓을 쓰고 술띠를 맨 것이다.

춤사위의 이름이나 내용을 말로 설명하자면 두 춤은 비슷한 설명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는 김동원씨의 학춤과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 김덕명씨의 학춤은 한눈에도 그 개성의 큰 차이를 짚어낼 수가 있다. 가까운 지역에서 전승되어온 같은 이름의 춤이면서도 현재의 춤이 보여주는 모양새는 무척 다르다.

그러므로 이 춤들은 이름이 같고 복식이 비슷하고 언뜻 본 춤의 겉모습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묻어둘 것이 아니라 다른 특색, 더 많은 다양성을 찾아낸다는 의미에서 찬찬히 들여다보고 소중한 것을 놓치지 말도록 노력해볼 필요가 있다.” (무형문화재 예능조사 연구보고서(조사보고서: 제243호 양산학춤, 조사자: 무용평론가 구희서, 조사기간: 1996. 11.6∼11.8)

구희서 선생이 양산사찰학춤의 문화재 지정 의미에 대하여 쓴 글이다. 조사보고서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맥, 인맥 등 인정적 관점으로 작성할 때 선생은 엄격하고 냉철한 잣대로 작성, 보고했다. 무형문화재 동일화 현상에 대한 우려와 다양성의 관점을 강조한 인식은 고인이 경기여고와 이화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등에서 일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1970년 스물아홉 나이에 늦깎이로 신문사에 입사했다. 1994년까지 24년간 한국일보와 일간스포츠 문화부에서 연극전문기자로 활동했다. 1996년 ‘히서연극상’을 만들어 연극인을 격려한 활동에서도 선생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짐작할 수 있다. 필자는 아버지 김덕명(1924∼2015,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 및 양산학춤 예능자)의 소개로 뵙게 된 이후, 선생을 여러 차례 만났다. 서울 공연에서 뵐 때면 아버지에 대한 회고를 하셨다. 지상으로 부음을 듣고 무척 가슴이 아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조류생태학박사·철새홍보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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