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 여자의 삶? 아니 인간의 삶!
82년생 김지영 - 여자의 삶? 아니 인간의 삶!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2.26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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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2년새 김지영' 한 장면.
영화 '82년새 김지영' 한 장면.

 

결혼이 연애의 연장선상이라 여기기에 다소 껄끄러운 건 사랑해서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면 이제 오롯이 사랑만 나눌 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결혼을 하게 되면 사랑에도 ‘일’이란 게 생겨버린다. 그걸 처음 깨닫게 되는 건 바로 결혼식을 준비하면서부터다.

같이 살 집도 찾아야 하고, 혼수도 같이 보러 가야하고, 지인들에게 청첩장도 돌려야하고, 그 중에는 직접 찾아뵙고 결혼 소식을 알려야 될 분들도 적잖다. 하여간 결혼을 결심하는 순간부터 할 일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랑=연애’라면 ‘결혼=사랑+일’이 아닐까.

그런데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으면 일은 더 많아진다. 그것도 굳이 공식으로 표현하자면 ‘결혼+출산=사랑<일’ 정도가 되지 않을까. 물론 2세의 기쁨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벅찬 일이겠지만 들어보니까 육아라는 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다. 육아에 지치다보면 ‘사랑’이라는 단어는 점점 원시 시대 이야기가 되어가고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삶은 이제 아이에 대한 보호자로서 ‘아빠’와 ‘엄마’의 삶으로 바뀌게 된다. 애도 안 낳아봤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꼭 낳아봐야 알까. 훗!

한편 연애는 ‘일대일(一對一 )’이지만 결혼은 ‘다대다(多對多)’다. 그러니까 연애는 그 남자와 그 여자가 만나는 거지만 결혼이란 ‘그 남자의 집안’과 ‘그 여자의 집안’이 만나게 되는 일이다. 역시나 일이 많아진다. 물론 그 일에는 부부싸움도 포함된다.

조남주 작가의 동명 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눈길이 갔던 건 여주인공인 지영(정유미)의 남편 대현(공유)이었다. 번듯한 직장에 잘생김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다정다감하고 세상 잘해주는 최고의 남편을 만났는데도 지영의 삶은 고달프기 그지없다. 그런 남편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는데도 그녀는 지금 정신병까지 앓고 있다. 가끔 다른 사람이 빙의된 듯 헛소리를 하는데 정작 지영 자신은 그걸 모르고, 남편인 대현만 혼자 속앓이를 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와 감독은 그런 지영을 통해 최적의 상태를 갖다 놓은 뒤 결혼이라는 제도를 아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었던 것 같다. 쉽게 말해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고, 이렇게 좋은 남편을 만났는데도 결혼은 고달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반대급부가 숨겨져 있다. 얼핏 지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영화 속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사실 남편 대현이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수심 가득한 얼굴로 정신과 의사를 찾은 대현은 아내가 다른 사람이 빙의돼 헛소리를 하는 영상을 보여주면서 왜 그런 건지 자신이 먼저 알고 싶어 한다. 속마음은 아마 이렇지 않았을까? ‘내가 이렇게 잘해주는데 왜 이러는 걸까요?’ 이후 남들이 알까봐 어쩔 줄 몰라 하며 혼자 근심 속에서 동분서주하는 대현의 모습은 딱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대현은 아내를 위해 육아휴직까지 결심하기도 한다. 그것도 지영이 적성을 살려 직장생활을 다시 하고 싶다 해서 자신이 육아휴직을 하며 애를 키우려 했던 것. 잘 다니던 직장에서 남자의 육아휴직이란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알거다. 세상에 이런 남편이 어딨나?

내가 같은 남자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이 영화가 올곧은 페미니즘 영화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현실에서 대한민국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남성들의 무례함, 또 육아휴직 등 우리 사회 복지제도의 현실적인 모순도 중간 중간 건드리지만 지영이 겪고 있는 삶의 고달픔은 남성으로 인해 그렇다기보다는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런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지영은 처음 정신과 의사와 만나 자신의 삶에 대해 이런 하소연을 한다. “선생님. 저는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로 가끔은 행복하기도 해요. 그런데 또 어떤 때는 어딘가 갇혀 있는 기분이 들어요. 이 벽을 돌면 출구가 나올 것도 같은데 다시 벽이고, 다른 길로 가도 벽이고. 그냥 처음부터 출구가 없었던 것도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면 화가 나기도 하고. 그런데 또 알겠어요. 사실은 다 제 잘못이예요. 다른 누군가는 출구를 찾았을 터인데 저는 그런 능력이 없어서 낙오한 거예요.”

이 대사를 듣는 순간 82년생인 지영에게 난 이런 말을 해주고 싶더라. “74년생인 나도 아직 출구를 못 찾았다”고.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다. 그렇게 삶에는 답이 없고, 우리 모두는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다 가끔 웃음이 아주 많은 날을 맞게 되면 땡잡은 거고. 2019년 10월23일 개봉. 러닝타임 118분.

취재1부 이상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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