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역사, 동천(東川)을 주목하라
울산의 역사, 동천(東川)을 주목하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2.16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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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대곡박물관장을 따라나섰다. 다달이 갖는 ‘문화가 있는 날’ 행사지만 이번에는 동천권역 중심의 유적지 탐방이 중심이어서 귀 기울여 듣고 싶었던 것이다. 울산 역사에 대한 신 관장의 전문성과 각별한 애정을 많은 이들이 믿고 따르는데, 필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관장의 표현 중에 ‘동천(東川)’을 주목해야 한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동천은 하류 일부를 빼고는 거의 농소 땅을 가로질러 흐르면서 젖줄 역할을 해왔다. 그러니까 ‘농소(農所)’라는 지명은 동천이 고래(古來)로부터 비옥한 농토를 제공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어느 곳이든 농경이 용이하면 사람들이 몰린다. 사람이 몰리면 문화가 형성되고, 그들이 살다간 흔적들을 남기게 된다. 울산 땅 전체가 그러했기에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지마다 두드러진 특징을 보이면서 각광을 받아왔다. 면적 대비 매장문화재는 한반도에서 울산이 으뜸이라는 데는 이설이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동천 유역의 역사는 그 중요성에 비해 시민들의 시선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지 않나 싶다. 경상좌도 병영성, 반구동 유적, 중산동 유적, 창평동 유적, 달천철장, 기박산성, 관문성……. 어느 것 하나 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병영성을 둘러보기 위해 외솔기념관 앞에서 하차했다. 동천의 옛 이름이 ‘어련천(語連川)’이어서일까, 동천에서 뛰놀았을 외솔 최현배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갈고 닦은 학자이다. 성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노라니 동천 강물은 바다로 향하고, 대지들은 햇살 아래에 평화롭게 펼쳐지고 있었다. 오래 전 옛날에는 지금과는 달리 사람들이 사는 집들도 주변 풍경에 스며들어 보이는 것 모두가 자연이었을 것이다. 강 하구의 사포가 옛 신라시대 동남권 국제무역항이었으니 지금의 국도 7호선 길로 경주와 이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오갔을 것이다.

발을 딛고 선 곳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영성이었다. 이 성은 1894년(고종 31년)까지 480여년이나 존속한 곳으로 둘레는 9천316척, 높이는 12척이었다. 사방에 성문을 두었고, 서문과 북문에는 옹성을 쌓았으며, 성벽 곳곳에 치성을 만들었고, 둘레에는 해자를 팠다. 주진군 4천200명을 6개 번으로 나누고, 번마다 700명씩 배치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을지. 성내에 7곳의 우물이 있었지만 산전샘 물은 그 시절에도 인기였었다. 이곳에 근무했던 김종직이 남긴 시문이나 박인로의 태평가도 품격이 드높다.

동천 하구의 사포는 번성했던 흔적들이 드러났었다. 경주와 가까워서 신라의 무역항 역할을 한 곳이라는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것들이 바로 반구동 유적이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발굴한 그곳의 80m 길이의 목책, 길이 35m에 달하는 건물지, 연꽃무늬수막새, 삼국시대 건물지의 발굴과 당(唐)대의 중국자기 출토는 반구동 유적을 고대 울산항으로 추정할 수 있게 했다. 그 외 7세기 전반 무렵의 기와 130여점 등은 당시 울산이 차지하는 비중을 잘 말해주는 것들이었고, 청동기시대 유적, 반구동 토성 관련 유적 등도 확인되었다.

창평동 유적은 넓게 분포하고 있다. 농소운동장 부지에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를 알 수 있는 다수의 수혈(竪穴)과 주혈(柱穴), 우물 등이 확인되었다. 농소차고지에서 발굴된 목관묘에서는 세력을 상징하는 위세품인 동경(銅鏡)이 나왔고, 그 외 철검, 철촉 등이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가까운 거리의 매곡동 생활유적인 청동기시대의 움집주거 터, 삼국시대의 숯가마는 인근에 달천철장이 위치하는 것을 볼 때 이 일대에서 활발한 제철활동이 있었던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창평동과 상안동 지석묘도 동천에서 멀지 않다.

달천 유적은 청동기시대부터 근대까지 다양한 유구가 조성된 복합유적이다. 채광과 관련된 유구는 당시의 채광기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출토된 토기로 보아 울산지역의 국제성을 알 수 있다. 달천철장도 당연히 중요하다. 중산동 유적은 다양성을 최대한 보여준 대규모 고분군으로 동천과 근거리이다. 이곳에서는 오리모양토기 두 점 등 1천200여 점의 토기와 둥근머리큰칼 6점을 비롯한 200여점의 철기, 금제 및 금동제 장식 등 다량의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이곳 세력가 탈해가 왕의 지위를 갖게 된 것은 그가 쇠를 부릴 줄 알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중산동 유적 가까이에 울산과 경주의 경계인 관문성이 있다. 신라의 왕경을 지켜주던 12km 길이의 장성이다. 농소 사람들은 이 성을 ‘만리성’이라 불렀는데, 이 성의 동쪽 산정에는 기박산성이 있다. 울산 의병들이 임란 때 조선 최초로 결진한 곳인데, 신흥사 승병들도 합류했다. 북구청은 지금 ‘기박산성의병역사공원’ 조성에 들어갔다. 향후로는 유포석보와 신흥사, 달천철장 등과 엮어서 관광벨트화를 추진하게 된다. 만리성 바라보며 굽이치는 동천은 하나의 문화권역을 형성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유장하게 흘러갈 것이다.

이정호 수필가·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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