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꽃의 노래
억새꽃의 노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2.16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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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이 고향인 가수 고복수의 노래 ‘짝사랑’에는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라는 대목이 나온다. 화려하거나 당당한 모습과는 거리가 먼, 바람이 부는 대로 군락을 이루어 하늘거리는 억새가 울산을 대표하는 새가 되었다.

가을이면 전국 최대인 영남알프스 억새군락을 보려고 수많은 산악관광객이 신불산 칼바위 능선에 등산복의 꽃을 피운다. 태화강 명촌교 인근에도 황혼과 어우러진 억새꽃 장관이 일품이다. 울산의 자연경관을 장식하는 억새도 대단하지만 인생 84세에 「억새꽃」이란 시조집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 최인수 작가의 정진에 감사와 경의와 찬사를 함께 보낸다.

경남 사천 서포에서 출생한 최인수 작가는 한국방송통신대학 농학과를 졸업하고 울산에서 농촌지도직에 봉직하다가 정년퇴임했다. 타고난 감수성과 각고의 노력으로 1998년 농협중앙회 공모 수필부문 최고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2012년 계간 《수필시대》에 등단을 알렸다.

이후 2016년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수필부문 입상, 제20회 울산 전국시조백일장 차상, 2018년 샘터 시조상 장원(억새꽃), 《현대시조》 겨울호 신인상 수상(우리 소나무)의 영예도 차례로 안았다.

현재는 문수수필담과 울산시조시인협회 회원으로, 울산문수실버복지관 한자교실 강사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번 시조집 「시인의 말」에는 긍정과 비장함, 생명존중의 무식(無息)이 깊게 배어 있다.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 방점 하나 찍는 그날까지/ 거북이걸음을 멈추지 않으리라.’ 생명산업인 농업을 위해 한평생을 달려온 작가는 「목련 지다」에서 ‘덩그런 낮달 앉힌 채 어디론가 가고 없다’ 라고 했듯 세월의 흐름도 목련을 통해 노래한다. 때론 옥수수를 ‘팔월의 이랑마다 포복하는 뙤약볕’이라며 작열하는 여름을 노래하기도 한다.

배고픈 시절을 지나온 우리는 이팝나무에 대한 간절함이 있다. 작가는 이팝나무를 보고 ‘허기를 달래주는 봄의 어깨춤’이라며 배고픈 시절을 회상한다. 「우리 소나무」에서는 ‘풀대 죽 못 끓여서 애태운 울 엄니는/ 들에서 삘기 뽑고 산에 가 송기 꺾어/ 허기진 세월 달래며 질긴 세상 살았다.’ 란 표현으로 초근목피로 견딘 모진 세월과 뒷동산의 굽은 소나무를 한 장의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대조시킨다.

「반구대 암각화」에서 작가는 ‘칠천 년 잠을 깨고 눈 비벼 일어선다. 먼 바다 고래 떼도 연안으로 불러들여, 지상낙원이었을’이란 말로 우리를 칠천 년 전 유토피아의 세계로 안내한다. 「억새꽃」에서는 오는 세월과 가야할 세월을 곧은 신작로처럼 보여준다. ‘머리를 빗어가다/ 가을 온 줄 알았다/ 저무는 산등성이/ 나부끼는 은빛 물결/ 서둘러/ 가야할 길이/ 가르마로 놓였다.’

작가는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지금 내가 서 있는 길은 어디쯤인가를 가을에 흔한 억새꽃으로 나타낸다. 「꾸밈없는 광고」에서는 ‘할머니 추위 입고/ 잘 익혀낸 군고구마/ 세 개에 이천 원요/ 삐뚤삐뚤 표지 글씨/ 손 시린/ 발길들 멈칫/ 호호 불며 읽는다.’란 표현으로 겨울의 풍경을 그려낸다.

이렇게 삶과 계절의 수레바퀴를 돌려 「다시 길 위에」 선 작가를 그려보자. ‘만약 신이 있어/ 날 버리지 않는다면// 시련의 이 길 위에/ 주저앉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던진 주사위/ 한 판 세상 아니냐// 아직 나에겐/ 젊음이란 밑천 있기에// 설령 돌부리에/ 생채기가 난다 해도// 또 한 번 오뚝이 되어/ 묵묵하게 갈 것이다//’

시간이 돌아 세월이 되고 세월이 흘러 인생의 역사를 그려내는 시인의 시에는 가을 노래가 많다. 농익은 계절, 수많은 일상에 대한 수확으로 더 깊이 성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옥수수 밭」「이팝나무」「수저 두벌」「더부살이」「바느질」「부지갱이 나물」 「시래기」「호박」「전통시장」「멸치」 등의 제목에서는 시대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읽을 수 있어 우리들이 가난의 긴 터널을 지나 비로소 억새꽃 길을 걷게 되기까지의 족적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윤주용 울산시농업기술센터 소장·농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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