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앵예술제가 울산대로 간 까닭은?
전화앵예술제가 울산대로 간 까닭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2.08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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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금) 오전, 울산학춤보존회 전수관에 다인, 무용인, 교수, 시인, 언론인 등 여덟 명이 모였다. 열흘 전에 약속한 만남이었다. 일행은 제18회 전화앵예술제를 일주일 앞두고 현장답사에 나섰다.

다인(茶人)이 다과를 올리자 일행은 분향재배로 예를 올렸다. 곧이어 노봉 김극기(1150경~1204경)가 열박령에 묻힌 전화앵을 찾아 지었다는 시 ‘조전화앵(吊?花鶯)’을 새긴 시석(詩石) 앞에 모였다. 각자 원문의 내용과 시어(詩語)를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윽고 시장기를 느낀 일행은 가까운 봉계장터 칼국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활천을 찾을 때마다 점심을 해결하던 식당이다.

일행은 여기서도 전화앵 이야기를 이어갔다. 시장기마저 잊은 듯했다. 그 때문인지 칼국수 여덟 그릇을 한꺼번에 주문받은 초로의 여주인도 여유를 되찾았다. 일행은 식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뒤 헤어졌다. 시인은 ‘꼴망태’라는 상호에 관심을 보였다.

지난 4일(수) 오후 3시∼6시, 울산대 시청각교육관 다매체강당. ‘제18회 전화앵예술제’가 예술대학 미술학부 섬유디자인학과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렸다. ‘동도(東都) 기(妓)’의 예명(藝名)으로 짐작되는 ‘전화앵’이란 이름을 내걸고 시작한 이후 열여덟 번째로 맞이한 지역 예술행사였다. 그러나 이번 행사는 17회 그 이전의 행사와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역사와 전승, 그리고 학문까지 어우러진 행사였다.

필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활천마을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진 ‘장승배기 기생묘’의 이야기, 섬유디자인학과 개설 31주년의 의미를 한데 녹여낸 특강 ‘전화앵예술제의 의의와 발전방향’을 발표했다. 전화앵예술제가 울산대로 간 까닭이기도 했다. 이 지속적인 행사의 주춧돌은 지난 2002년에 처음 놓아졌다. 따지고 보면 김극기가 지은 ‘조전화앵’의 시어 즉 노래와 춤을 부각시키고 이 시대의 옷을 입혀 재활용하기 위한 의도된 행사였다.

전화앵에 대한 첫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경주부 열박령조에 나오는 “悅朴嶺在府南三十里東都妓?花鶯所埋之地(=열박령은 부로부터 남쪽 30리에 있는 곳으로, 동도 기 전화앵이 묻힌 곳이다.)”란 표현이다. 그러나 《동경통지》(1933) ‘명기(名妓) 고려(高麗)’조에는 “?花鶯高麗名妓墓在悅朴嶺(=전화앵은 고려의 이름난 기녀로 묘는 열박령에 있다)”란 표현이 나온다. 다양한 주장과 해석이 나오는 것은 ‘기(妓)’에 이어 ‘명기(名妓)’란 표현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번 행사가 치러진 곳은 ‘전화앵 묘’도 울산학춤 전수관도 아닌 울산대 대강당이었다. 섬유디자인학과 창설 31주년이 맞물리면서 교수와 학생들도 다수 참여했다. 17년의 현장과 전승의 한계에서 벗어나 학문의 전당에서 치러졌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전화앵에 대한 학술적 발표는 2014년(8.12.) 필자가 ‘전화앵의 무용 콘텐츠 활용’이란 주제로 울산무용협회 회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학생과 교수, 일반인이 그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 하겠다.

앞으로 기생문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땅속에 묻고 목적도 새로 바꾸어 전화앵예술제를 국악·무용 인재의 등용문으로 활용하도록 하자. 그런 목적에 접근하려면 무엇보다 여성예인의 명칭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부터 알 필요가 있다. 신라시대에는 ‘기생’이라는 말은 없었고 전문가를 일컫는 ‘-척(尺)’이란 용어가 사용됐다. 역사서에 기록된 기(妓) 혹은 명기(名妓)란 표현은 기록자가 살던 시대의 사회상의 반영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또한 전화앵이 기록된 최초의 역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동도기(東都妓)’는 애써 외면하면서 훨씬 후대에 기록된 동경통지(1933)의 ‘고려명기(高麗名妓)’를 내세우는 것은 삼갔으면 한다. 최초 기록의 가치와 참고문헌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자는 얘기다. 후대의 기록은 최초의 문헌을 바탕으로 가감되기 마련이다.

편하게 말하자면, 전화앵은 신라시대의 예인이었다. 죽은 장소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예인은 전화앵밖에 없다. 노봉(老峰)이 시를 통해 대신 말했다. 거듭 강조하지만, 십 수 년에 걸쳐 이어온 전화앵예술제는 ‘동도 기생’을 부각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다. 기생문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꾸고 국악·무용 인재 발굴의 등용문으로 활용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성경과 불경에는 ‘라합’과 ‘마등가’가 등장한다. 기생 혹은 창녀에 대한 선험적, 망상적 관점에 서는 이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전화앵에 대한 무관심이나 기생에 대한 악의적 해석은 어쩌면 선험(先驗)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이제 기생문화에 대한 인식전환에 울산이 앞장서야 한다. 논개, 황진이, 매창에게는 후하게 대하면서도 역사서에 기록된 전화앵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무슨 이유로 외면하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전화앵예술제에는 양산 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의 친필휘호 ‘가선무삼(歌扇無衫)’이 특히 빛을 발했다. 스님은 지역 예인(藝人)의 흔적을 발굴·조명하여 시대에 맞게 활용하는 ‘실천’을 강조하셨다. 이 글씨는 그동안의 실천을 발판삼아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라고 격려하시며 써주셨다. 이번 행사 기간에는 섬유디자인학과 학생작품전, 국제교류전 가선무삼, 김언배 교수 초대작품전이 함께 열려 다채로움을 더했다.

김성수 조류생태학박사 /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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