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과 헤엄
헤어짐과 헤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2.08 20: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태화강이 국가정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원과 국가라는 낱말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정원이든 공원이든 자연이 깃든 공간이 생기는 일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태화강 줄기를 자연적으로 살리는 정원이 되기를 바란다. 강물을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고 만지고 느낄만한 공간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강은 예전부터 우리네 곁을 가까이 지킨 공간이 아니던가. 멀리서 오는 관광객 위주보다는 이웃처럼 울산 시민의 발자국이 많이 닿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헝가리 소설 『수영하는 사람』에서도 헝가리 곳곳을 떠도는 남매가 나온다. 남매의 엄마 카탈린은 시대를 억압하는 독재를 마다하고 평화와 자유를 찾아 떠난다. 이후 홀로 남은 아버지는 한곳에 머무르지 못한다. 그런 아버지를 통해 카타와 이스티는 수시로 길 떠나는 법을 배운다. 버스, 기차, 배를 타고 떠나 그들이 닿는 곳은 어김없이 물이 흐른다. 아버지 칼만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유독 잠수하는 장면이 많다. 물속 깊은 곳, 아무 소리도 없는 심연에서 아버지는 거추장스러운 삶의 흔적을 씻어내고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

어릴 적 살던 동네 곁에는 작은 강이 흘렀다. 남한강 줄기였는데 폭과 깊이가 꽤 차이가 나는 강이었다. 수초를 잡기도 하고 아이들과 잠수내기를 하던 곳이었다. 『수영하는 사람』의 카타나 이스티처럼 나는 그 강에서 멱을 감았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그 강이 떠올랐다. 빛으로 반짝이던 물살과 아이들의 웃음과 깜깜한 밤에 별빛과 함께 헤엄치던 시절이 생각나 살짝 웃었다. 여름날 강물을 거스르며 놀던 때, 햇살은 물빛을 따라 은어 비늘처럼 반짝였다. 강가 얕은 둔덕에 누워 해바라기를 하던 일이 어제처럼 흘렀다.

강물은 늘 흐른다. 쉬는 법이 없다. 그 속에서 우리도 흐른다. 『수영하는 사람』의 등장인물 카타나 이스티처럼, 아가 아줌마와 졸탄 아저씨, 민치 왕고모와 소피 고모, 피스타 고모부, 비락 언니와 예뇌 오빠처럼 말이다. 예전에 읽은 베트남의 소설 『끝없는 벌판』에서도 강은 예외 없이 등장인물의 곁을 지킨다. 강은 왠지 바다와는 달리 조금 더 우리 곁에 가까운 느낌이다. 마치 이웃에 사는 이들처럼 말이다.

내 온 몸을 떠받치는, 중력을 거부하는 자연은 물밖에 없지 싶다. 차갑고 센 물결이 이는 어딘가에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솟구친다. 어미의 태속에서 배운 유영의 기억은 몸 전체에 남아 우리에게 물을 찾도록 하는지도 모른다. 양수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문득 궁금하다. 내 몸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원초적 감각이 그립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감각과 기억이 내 몸 어딘가에 저장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헤어짐과 헤엄, 써놓고 보니 둘은 참 닮은 낱말이다. 엄마 뱃속을 헤엄치던 아이는 엄마의 몸과 헤어져야만 세상에 나온다. 그러고 보니 헤엄 뒤에 헤어짐은 어쩌면 당연한 순서가 아닐는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일은 인생이라는 강에서 되풀이되는 헤엄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이와 작별한 이스티가 꿈꾸는 곳이 물속이었다면 이스티는 꿈을 이룬 셈이다. 죽음을 사이에 둔 헤어짐은 애달프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 애달픔을 덜어낼 기운이 생길 것만 같다. 어린 시절 멱 감던 강물과 헤어졌듯이 인생 도처에서 만날 또 다른 강은 어디일지. 함께 헤엄치고 자맥질하던 친구가 새삼 그리운 날이다.

울산은 바다가 멀지 않지만 태화강 줄기가 도심을 가로질러 흘러서 좋다. 철을 따라 피는 꽃과 어김없이 날아드는 새, 쉼 없이 자라는 대나무 숲이 가까워 매력적이다. 강을 따라 걸으며 우리는 인생을 배우는지도 모른다.

내일은 태화강에 가야겠다. 대숲을 거닐고 백로의 날갯짓을 구경하고 붉은 나뭇잎이 남은 벚나무를 봐야겠다. 강은 사철 좋다. 그냥 좋다.

박기눙 소설가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