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힘, 동시
긍정의 힘, 동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2.03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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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열 권도 넘는 큰딸의 필사 노트를 보게 되었다.

노트는 큰딸이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하루에 한 편씩 옮겨 적어놓은 동시들로 가득했다.

동시로 필사 노트 한 권을 다 채우면 미리 장만해둔 선물을 하나씩 주곤 했는데, 큰딸은 그럴 때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람쥐처럼 폴짝폴짝 뛰던 모습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어쩌면 선물을 받는다는 작은 기쁨이 더 한층 신나게 동시를 쓰게 한 자극제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큰딸에게 동시 낭송을 지도해 주고 필사하도록 이끌어 주신 선생님이 참 감사하다.

많은 동시들 중에서도 특별히 눈길을 끈 것은 김소운의 ‘모과’라는 동시였다.

울퉁불퉁

내 얼굴이 못생겼다고

빈정대며 놀려대던

아이들이

한동안 사귀어보더니

내게서

참 좋은 향기가 난다고

코를 벌름거리며

졸래졸래

내 뒤를 따라다닌다.

왜 모과라는 동시를 골라 적었을까.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려 그런 건 아니었을까. 사실 큰딸은 어렸을 적엔 예쁘다는 말을 별로 듣지 못했다. 하지만 커 가면서부터는 점점 매력적이고 예뻐졌다. 어쩌면 언제나 입가와 눈가에 생글생글 웃음을 담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처럼 그렇게 한 편, 한 편 노트에 옮겨 적은 덕분에 교육효과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글쓰기를 따로 배우지 않아도 문장이 자연스러웠고, 한글날 백일장에서는 시를 기발하게 써서 선생님들을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담임선생님들이 큰딸에 대해 하신 말씀 중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성격이 밝고 긍정적이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며, 행복을 느끼면 행복하다고 말할 줄 알고, 아이디어가 무척 창의적이라는 칭찬이었다. 그건 아마도 마음의 밭에 동시의 씨앗을 많이 뿌려 놓은 덕분이 아닐까 싶었다.

대학입시 면접을 볼 때 큰딸은 면접관에게 동시를 필사했던 일을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전공과 동시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물어보는 면접관에게 “모든 학문에 감성을 입히면 효과는 두 배가 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는 것이다.

큰딸이 다니는 학교는 시내에서 제법 떨어져 있다 보니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큰딸은 달랐다. 오히려 자연이 주는 혜택을 최대한 누리고 즐길 수가 있어서 좋다는 것이었다.

캠퍼스의 사계절이 얼마나 예쁘고 마음에 들었던지 큰딸은 자주 학교 주변의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았다가 ‘가족 톡’에 올려주곤 했다. 눈이 시리도록 달빛이 고운 날에는 달을 보라면서 전화도 하기도 했다. 아마도 동시를 많이 읽어서 따뜻한 감성을 키웠기에 자연이 주는 선물을 오롯이 받고 느낄 수 있었으리라.

지금은 어느새 24살이 되어 대학원 진학을 앞둔 딸은 요즘도 스스로 시집을 구입해서 읽고 친구들에게 선물까지 해 준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솟아 오르는 걸 느꼈다.

딸이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으면, 자신이 써 놓은 동시 노트를 보여주면서 동시를 필사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겠지. 그런 날이 언제일지는 몰라도 그 때가 몹시 기다려진다.

천애란 재능시낭송협회 울산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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