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의 드라마에세이]동백꽃 필 무렵 - 사랑이라는 스릴러
[이상길의 드라마에세이]동백꽃 필 무렵 - 사랑이라는 스릴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1.28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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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한 장면.

영화든 TV드라마든 멜로(로맨스)와 스릴러는 물과 기름처럼 궁합이 안 맞다. 다시 말해 화학적 결합으로 이어지기가 어렵다는 말씀.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멜로와 스릴러는 감성의 질이 상극(相克)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조화가 안 되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먹어 버리게 된다. 사실 그렇잖은가. 핑크빛 멜로의 감성에 빠져들다 시커먼 스릴러의 공포가 웬 말이란 말인가. 핑크와 검정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색이다. 다시 말해 상생(相生)하기 어렵다.

내가 최근에 본 TV드라마 가운데는 <오 나의 귀신님>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박보영의 초절정 애교 신공과 조정석의 능청스런 연기가 잘 버무려진 <오 나의 귀신님>은 로맨스물로는 가히 극강의 전투력을 자랑한다.

남자건 여자건 둘의 애정행각을 지켜보다보면 그냥 녹아버린다. 하지만 <오 나의 귀신님>은 스릴러도 품고 있는 드라마였다. 여주인공인 봉선(박보영)은 원래 소심하고 자신감 결핍에 시달리는 여자지만 자신의 몸에 처녀귀신인 순애(최슬기)가 빙의되면서 성격이 180도 달라진다.

문제는 순애를 죽이고 그녀를 처녀귀신으로 만든 살인마도 등장하면서 가끔 드라마의 분위기가 뜬금없이 어두워진다는 것.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몸에서 거부 반응이 일어나면서 드라마가 싫어지더라. 해서 중반부터는 드라마를 끝까지 볼지 말지를 고민하기도 했었는데 그 때 당시 ‘앞으로는 어떤 드라마든 멜로에 스릴러를 첨가해 다된 밥에 재(灰) 좀 뿌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더랬다.

그 때문이었을까.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됐던 TV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도 연쇄살인마가 등장한다는 소식에 아예 보지 않으려고 작정을 했었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첫 회를 보게 됐고, 시작한 지 10분 만에 빠져들고 말았다. 시쳇말로 센스가 있는 드라마였다.

특히 캐릭터들의 개성 넘치고 톡톡 튀는 매력과 인간미 넘치는 ‘옹산’이라는 시골 동네의 구수함과 따뜻함이 잘 버무려져 마치 2005년 박광현 감독의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을 드라마로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걱정은 됐다.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만큼 <오 나의 귀신님>처럼 간간히 거부반응이 일어날까봐. 그런데 회가 거듭될수록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아갔는데 우선 2003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을 연상케 하는 치밀한 스릴러적인 요소가 컸던 것 같다.

그러니까 곁가지로 대충 만든 스릴러가 아니라 용식(강하늘)과 동백(공효진) 간의 로맨스만큼이나 공을 들였다는 것. 하지만 상극인 로맨스와 스릴러 간의 화학적 결합이 가능했던 가장 큰 요인은 개인적으로는 용식이라는 캐릭터에 있다고 본다. 경찰인 용식에겐 드라마 내내 두 가지 미션(임무)이 주어진다.

바로 옹산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연쇄살인마 ‘까불이’를 잡는 것과 첫 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동백’의 사랑을 쟁취하는 게 그것. 그런데 까불이가 동백이를 노린다는 점에서 그 두 가지 미션은 결국은 같아진다. 그러니까 까불이가 만약 동백이를 해치게 되면 다른 미션은 불가능해진다.

그런데 불의를 보면 눈빛이 바뀌면서 헐크로 변하는 용식은 까불이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지만 동백은 무서워했다. 다시 말해 그가 두려워했던 건 스릴러가 아닌 로맨스였던 것. 마지막에 반전이 있었지만 36회에서 용식은 결국 까불이를 잡은 뒤 동백에게 달려간다. 하지만 동백은 아들 필구(김강훈)를 위해 용식과의 이별을 이미 결심한 터였고, 분위기를 눈치 채고 점점 일그러져가는 용식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착한 헐크를 KO시킬 말을 알았다.’ 그런 뒤 그녀는 용식에게 “나 여자 안하고, 엄마 할래요.”라고 말한다. 동백의 그 말에 연쇄살인마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용식은 마치 지구가 멸망한 듯 무너져 내린다. 그렇게 헤어짐의 공포는 연쇄살인마도 압도해 버린다.

현실에서 사랑은 단순 멜로나 로맨스가 아니다. 온통 핑크빛이지도 않다. 썸을 탈 때 상대방이 마음을 몰라주거나 사귀다가 싸울 때, 그러다 용식처럼 갑자기 이별을 통보받거나 할 때 순식간에 검정색으로 바뀐다. 그 때의 공포감은 웬만한 공포영화 저리 가라다. 결국 사랑이란 헤어짐의 공포에 맞서 용식이처럼 싸워서 지켜내야 하는 것.

그러니까 사실은 스릴러에 더 가깝지 않을까. 불의를 보면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용감한 용식이지만 동백에게 고백할 땐 이렇게 말한다. “제가요. 동백씨를 쩌거해요.” 너무 좋아서 두려운, 그래서 사랑하는데도 차마 사랑한다고 말 못하는 게 바로 사랑이 아닐까.

2019년 11월21일 종영. 40부작.

취재1부 이상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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