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舊苔)’라는 단어가 있다. 직역하면 ‘오래 묵은 이끼’라는 뜻이지만 현실에서는 ‘옛 것을 버리지 못하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흔히 정치 분야에서 자주 쓰이면서 ‘구태정치’라는 고유명사화가 진행되고 있다.
현대자동차 노조의 차기 임원 선거를 지켜보면서 이 ‘구태’라는 단어가 문득 떠오른 건 지부장 후보들이 내건 공약 탓이 크다. 시대의 변화에 맞지 않는 그들의 공약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울산, 아니 대한민국 경제를 짊어지고 있는 한 축인 현대차다보니 한편으로는 우려스럽기도 하다.
지금 전 산업계는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해 제조경쟁력 강화가 미래 생존을 위한 최대 핵심 화두다. 그럼에도 해외공장 폐쇄, 친환경차 국내생산 강제, 자동화·외주화 저지 등을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미래 대응을 포기하자는 발상과 같다. 동일 기업 내에서도 경쟁력 없는 공장은 문을 닫는 것이 자동차 산업의 현주소인 만큼 이런 공약을 하기 전에 우선 국내공장 스스로의 경쟁력부터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때문에 ‘노사합심을 통한 국내공장 경쟁력 강화’같은 공약은 당연히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무려 4명이나 출마한 지부장 선거에서 그런 공약은 눈 뜨고 찾아봐도 없었다.
비판의 날을 좀 더 세우자면 대다수 후보들은 정년연장도 요구하고 있는데 당장 인원을 줄여 나가야 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정년을 연장한다는 건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또 청년 일자리 문제는 나몰라라 할 텐가. 진정으로 조합원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노조라면 지금은 무엇보다 인위적인 구조조정을 막고 재직자들의 고용안정을 최대한 지켜나가는데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일부 후보는 7/7근무형태 도입도 요구하고 있는데 노사가 15년간 논의 끝에 올해 들어 마지막 목표였던 8/8근무형태 시행의 종지부를 찍은 상황에서 시행한 지 불과 1년도 안 돼 이런 공약을 내세우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최소한의 현실성도 없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중소업체 직원들은 상상도 못할 최고 수준의 각종 복지를 지금도 이미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도 너도나도 전 복지 분야에 걸쳐 과도한 공약을 펴고 있는데 이 같은 공약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사회적 박탈감을 불러오지 않을까 걱정된다. 산업변화 대응을 위한 투자는 안중에도 없단 말인가?
만약 컨베이어 벨트에 이끼가 낀다면 어떡해서든 없애야 한다. 그래야 고장 없이 오래 쓸 수 있으니까. 물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산업 현장인 현대차 공장에 이끼가 낄 리는 만무하겠지만 이번 선거를 지켜보자니 내 눈에는 왠지 이끼가 보이는 것 같다. ‘구태정치’만 있는 게 아니다. ‘구태노동운동’도 있다. ‘구태정치’처럼 고유명사화가 되는 건 막아야 하지 않을까.
이상길 취재1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