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마을 편지] 장독대
[옹기마을 편지] 장독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1.25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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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머니들에게 장독대의 의미는 크다. 자식을 위해 정화수를 떠놓고 빌던 곳도 장독대였고, 집안의 대소사를 위해 기도하던 곳도 장독대였으며, 속상한 일 감추려고 눈물 흘리던 곳도 장독대였다. 장독대는 그 집안 음식 맛의 근간이자 그 집안 살림 밑천이기도 하다.

10말 정도 되는 큰 독을 하나 마련하려면 큰맘을 먹어야 했다. 대독 하나의 가격은 지금의 큰 냉장고 하나 가격과 맞먹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통으로 뚫린 통가마에서 옹기를 굽다 보니 한 가마를 구워도 대독은 몇 개만 온전한 상태로 나왔으니 큰 옹기의 가격이 비싼 건 당연했다.

큰 옹기의 가격이 워낙 비싸다 보니 서민층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옹기를 사용하기도 전에 미리 철사로 꽁꽁 동여매기도 했고, 사용하다가 금이라도 가면 철사 줄로 엮은 다음 단단히 묶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장독대의 크기나 옹기의 종류를 보면 그 집안 살림살이의 규모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가난한 민가의 장독대는 크기도 작고 디딤돌도 없이 부엌 뒤편이나 집안 한켠에 소박하게 차려졌으나, 사대부 집안에서는 디딤돌로 한 단을 높인 후 장독대를 차리고 때로는 야트막한 울타리를 치기도 했다. 궁중의 장독대는 어마어마하게 커서 장독대만 관리하는 상궁들이 따로 있었고, 바람이 잘 통하고 햇볕이 적당히 잘 드는 곳에 설치했다.

옛날의 장군들은 싸움터에 나가기 전에 꼭 장독대에 들러 장맛을 보고 나갔다는 일화가 있다. 장맛이 좋으면 그 집안이 흥하고 장맛이 없으면 그 집안이 망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흔히 뼈대 있는 가문 얘기를 할 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아침 일찍 새하얀 행주치마를 두르고 새하얀 행주를 쥔 채 장독대 닦는 모습을 비추곤 한다.

장을 담그는 일은 일 년 농사나 마찬가지다. 동짓달에 메주에 소금물을 붓고 숯과 고추, 대추를 띄워 장을 담그고 나면 여름이 되기 전에 간장과 된장을 나누는 ‘장 가르기’를 한다. 그러고는 간장단지, 된장단지를 연중 관리해야 하는데 그 집 안주인이 좀 부지런하지 않으면 장독대를 관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옹기는 숨을 쉬기 때문에 소금 성분이 기화하면서 옹기에 응고되어 하얗게 소금꽃이 피는데 이것을 ‘소금쩍’이라고 부른다. 이 소금쩍이 필 정도면 옹기를 자주 닦아주지 않았다는 뜻이고 소금쩍이 생길 정도면 덩달아 세균이 번식하고 있다는 의미이며, 세균이 번식하고 있다는 것은 장맛이 변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전의 우리 어미니들은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아침마다 장독대 닦는 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곤 했다.

장독대를 열심히 닦는다는 것은 그 집 안주인이 부지런하다는 의미이고, 부지런하다 보니 그 집안이 잘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집안의 살림 솜씨는 장독대에서 비롯되었고, 그 집안의 음식 맛 또한 장독대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우리네 살림살이에서 장독대가 얼마나 중요했는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장맛이 그 집의 음식 맛을 좌우했기에 우리 어머니들은 제발 장맛 좋게 해달라고 조상님들께 빌고 또 빌었다. 음력 정초에 사물놀이패들이 집집마다 장독대를 돌면서 지신밟기를 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주로 장독대는 우물 가까이에 많이 있었고, 봉숭아, 채송화, 목단꽃 등을 심어 장독대를 관리하면서 꽃나무도 같이 가꾸었다. 장독대는 간장, 된장, 고추장뿐만 아니라 젓갈류, 장아찌류, 곡류, 과일류 등 많은 것을 담았고, 곳간과 함께 여인들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초가집과 자그마한 장독대, 기와집과 담장 너머로 잘 꾸며진 장독대는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곳이 아닐까?

김미옥 울산옹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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