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철산업 중흥조, 구충당 이의립
조선 제철산업 중흥조, 구충당 이의립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1.19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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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쇠부리축제’는 2005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축제에는 ‘쇠부리소리’가 빠짐없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불매소리’이기도 한 이것을 무형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한 노력의 중심에 이태우 부원장이 있다. 울산 역사와 인물에 대한 글을 자주 쓰고 있는 내게 그가 ‘구충당 이의립’에 대해서 글 한 편 쓰면 좋겠단다. 우리 북구가 기리는 인물인데 아차 싶기도 하고, 글감을 늘 고민해야 하는 내게 참 반가운 제안이었다. 나는 다시 신임 원장 등 북구문화원 관계자들과 구충당 묘소 탐방을 발의하여 첫추위가 오던 날에 같이 다녀왔다.

묘소 탐방을 계기로 《국역 구충당문집》을 다시 집어 들었다. 《구충당문집》은 1910년에 처음으로 발간되었고, 2000년에 국역본이 나왔다. 이 국역본을 언젠가 대강 훑어보고는 서가에 꽂아두었는데, 다시 빼들고 몇 날 며칠 동안 정독했다. 감동에 앞서 우선 이 위대한 선인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참 부끄러웠다. ‘달천철장’은 신라의 부국강병에 기여한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인데, 왜 구충당이 발견했다고 하는가가 첫 번째 불신이었다. 두 번째는 문장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라는 나의 편벽함 때문이었다.

사실 ‘달천철장’의 역사성은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이전’과 ‘후한서’ 등 중국 문헌에 ‘한·예·왜’ 등의 나라들이 변한과 진한에서 철을 가져갔으며, 철을 사용하여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기록이 있다. 2000년대에 발굴한 기원 전후의 채광 유구는 표토 층에서 넓게 채굴한 것과 구덩이를 파서 채굴한 것 등 두가지 형태로 확인되었다. 또 출토된 토철이나 철광석에는 ‘비소’가 높게 검출되는 특징이 있는데, 이 ‘비소’가 ‘달천철장’의 철임을 고증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 문헌에 ‘달천철장’의 존재가 등장하는 것은 조선 초기부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달천철장’에서 세공(歲貢)으로 생철 1만2천500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또 유성룡의 <징비록>에 ‘임진왜란 때 이장손이라는 경주 사람이 달천의 철로 토함산 계곡에서 비격진천뢰를 만들어 경주성을 수복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1655년의 승정원일기에도 울산 땅에 쇠가 나는 곳을 언급하고 있지만 ‘달천철장’이 오랜 기간 휴면상태로 들어가면서 민간에서는 기억에서 잊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달천철장’의 휴면은 조선 조정의 채광정책과 관련이 깊다. 조선 초기에는 철물수공업이 성장함에 따라 철광의 개발도 촉진되어 산철지가 83개 읍으로 증가되었는데, 이들 산철지는 주로 사철광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세수를 부과하는 문제, 농민들에게 끼치는 영향 등으로 인해 조정이 금압정책을 펴서 오랜 기간에 걸쳐 채광이 거의 정지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채광 자체를 조정에서 금지시켜 온 결과 제철 분야도 정체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의 제철산업은 오랜 기간 쇠퇴한 가운데 왜란과 호란을 당했던 것이다.

양란 이후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이의립(1621-1694)이다. 그는 원래 유력 가문 후손으로 두서면 전읍리에서 태어났다. 극진한 효성과 문재를 타고났으나 양친을 일찍 여의고는 큰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오랑캐들에게 당한 것은 철제 무기 때문이니 철과 유황을 찾아서 나라에 충성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한 것이다. 벼슬길은 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으니 자신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겠다는 것은 가히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치술령에 올라 100일간의 기도 후 망부석을 보고 읊은 천여자의 글에서 그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26세(1646)에 시작된 이의립의 탐사활동은 장구한 세월이었다. 가야산을 시작으로 금강산, 구월산, 태백산, 백두산 등 명산거악을 두루 탐사했다. 등잔 밑이 어두웠을까, 그의 집에서 바라보던 치술령 너머에서 철을 발견한 것이다. 1657년, 11년 각고의 노력 끝에 울산 땅 달천에서 철을 찾아낸 것이다. 2년 뒤에는 수철(무쇠) 제조법과 반척곡(언양 반곡리)에서 발견한 비석(砒石)에서 비상(砒?) 만드는 방법을 풀었다. 현종 원년(1660)에 각궁(활)과 백철(함석), 연철, 세면포, 철환(쇠구슬), 부정(솥) 등 엄청난 양을 훈련도감에 바쳤다.

이의립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경주 추령 근처 권이산에서 구한 황석으로 유황을 제조하는 법을 터득했다. 현종 13년(1672), 생산한 유황을 비변사에 바치니 조정에서 숙천도호부사에 제수했으나 사양했다. 임금이 친히 독대하며 사패문을 내렸으니, ‘구충당’이라는 사호와 가선대부 품계와 함께 달천산 일대를 사패지로 내렸다. 구충당 이의립의 노력으로 조선의 제철산업이 부활했으니 공의 업적을 누구와 비견하리요. 구충당의 외동 신원마을 유허지와 두서 유촌마을 묘소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돌아본 그날은 참 의미가 있는 발걸음이었다.

이정호 수필가·울산학포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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