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운암의 바위그림
서운암의 바위그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1.17 20: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인 통도사가 거느린 암자는 자그마치 19개. 그 중 하나인 서운암(瑞雲庵)에 대한 ‘다음백과’의 서술 끝부분은 다소 의아한 느낌을 준다. “…특별한 문화재는 없지만, 주변이 야생화군락지로 유명해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앞으론 고쳐 써야 할 것 같다. ‘인간문화재급’ 성파(性坡) 방장스님의 기운이 서운암은 물론 통도사마저 끌어안은 영축산 전체를 휘감고 있기 때문이다.

10월 26일에 이어 성파 큰스님의 ‘토굴’이 올려다 보이는 서운암을 두 번째로 찾은 것은 11월 7일 오전. 일부러 짬을 낸 울산대 교수 세 분과 동행하기로 한 것은 큰스님을 작품 제작실에서 만나고 싶어서였다. 첫 방문 때는 손아래스님의 안내만 받았을 뿐 큰스님의 설명을 직접 듣지는 못했다.

토굴에서 다소 떨어진 큰스님의 작업실에는 울산의 바위그림 두 점이 실물 크기로 제작되고 있었다. 국보 제285호인 ‘반구대 암각화’와 제147호인 ‘천전리 각석’에 자개와 색깔을 입힌 창작품이 그것. 이번에는 큰스님의 지시를 받은 손아래스님이 반구대 암각화 그림판 위로 올라가 걸레질을 시작했다. 옻칠로 흐릿해진 천연색 바위그림을 또렷이 보이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거리를 두고 본 그림판은 발을 딛고 올라선 스님이 난쟁이로 보일 정도로 컸다.

큰스님에게 두 작품의 크기를 여쭈었다. “하나(반구대 암각화)는 세로 4m, 가로 6.5m 정도고 다른 하나(천전리 각석)는 세로 3m, 가로 9m쯤 될 걸세.” 그야말로 대작(大作)이다. 그럼 언제쯤 완성작을 볼 수 있을까? 대답이 돌아왔다. “작년 봄에 시작했는데, 내년 가을쯤 매듭지을 생각이지.”

울산 길손들의 길잡이 김언배 교수(울산대 섬유디자인학과)가 보충설명을 거들었다. “이 대작들, 섬유디자인 작품이라 볼 수 있지요. 바닥 소재만 해도 삼베가 여섯 겹이나 들어갔으니까. 그 위에 옻과 물감이 여러 번 칠해졌을 겁니다. 앞으로는 그려놓은 바위그림 위에 옻으로 덧칠한 다음 말리고 칠하기를 수차례 반복하실 겁니다. 맨 나중에는 사포질로 마무리하실 거고….”

작업을 구상하신 동기와 과정도 궁금했다. 과정에 대한 큰스님의 설명이 시작됐다. “암각화는 전 세계 것을 안 훑어본 게 없어. 국립경주박물관 자료도 하나 빠짐없이 입수했고 책도 많이 사서 보았지. 암각화를 복사한 뒤 기록대로 실물 크기로 확대했는데 큰 시행착오는 없었어.”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폈다는 말씀이었다.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이어졌다.

“암각화는 인류미술의 원조야. 세계의 자료를 그래서 수집하기 시작했어. 지금까지 밝혀진 암각화 중에 반구대 암각화만큼 오래 된 인류의 걸작은 별로 없어. 그것이 서구의 것이든 중국, 일본의 것이든…. 그리고 원시미술인 암각화는 공통점도 많아. 토속(土俗)에 따라 다르긴 해도 근본은 얼추 다 통하지.”

큰스님은 훼손이 심한 반구대 암각화의 보존방안에 대해서도 나름의 견해를 피력했다. 우리나라 마애불(磨崖佛)에서도 더러 볼 수 있듯 암각화 위쪽 지붕부위 바위에다 구멍을 뚫고 서까래 같은 보호막을 만든다면 비바람 정도는 너끈히 막을 수 있다는 지론이었다. 이런 말씀도 남겼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도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나는 등재가 안 되더라도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100~200년까지 보존된다고 생각해 보시게”

큰스님은 서운암의 바위그림 작품 두 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았다. 서구에 가면 대우가 굉장할 거라고도 했다.

그러나 완성된 작품들을 어디에 설치할 생각이신지는 여쭙지 않았다. ‘혹시 울산…?’이란 말이 나오다 들어갔다. 다음 기회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김정주논설실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