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파 큰스님의 눈에 비친 울산 (下)
성파 큰스님의 눈에 비친 울산 (下)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1.03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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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에 접어든 큰스님의 거실을 슬쩍 눈동냥 하듯 훔쳐보았다. 예술작품 아닌 것 없다던 일행 누군가의 말은 조금도 거짓이 아니었다.무심코 앉은 방석, 찻잔을 안은 다탁, 자개 박힌 채색항아리, 비구상 계열의 병풍그림에 이르기까지…. 그런데도 붙여진 이름은 ‘토굴(土窟)’이었다.

울산·충주와 함께 신라시대 야철지(冶鐵址)로 유명한 경남 합천군 야로면 야로(冶爐)리가 고향이라는 큰스님. 이야기 주제는 자연스레 ‘쇠부리’로 옮겨 갔다. “가야 때 울산의 제철기술이 신라로 이어지면서 철기문화가 더 발달되었지. 통일신라 이전에는 철기문화의 본고장이 울산이란 사실과 태화사 얘기를 전임 울산시장한테 일러주었는데 못 알아듣는 것 같았어. ‘태화사’ 하면 ‘불교’가 들먹거려질 텐데, 그게 싫었던가?”

하긴 그럴지도 몰랐다. 독실한 보수기독교 신자가 볼 때 불상(佛像) 받드는 일은 우상(偶像)숭배로 비쳐질 수도 있으니까. 다시 야철(冶鐵) 얘기로 돌아갔다.

“옛날의 철은 마사가 많은 땅에서 괭이로 파내는 사철(沙鐵)이 많았지. 특히 봉암사 주변은 산 전체가 철일 정도였으니. 여름철에 번개가 쳤다 하면 그 산 쪽에서 난리가 났지. 철이 워낙 많았으니까.”

큰스님은 다른 채철(採鐵) 방법도 들려주셨다. 철 성분이 섞인 돌을 물레방아로 찧듯이 해서 가벼운 흙은 걸러내고 무거운 돌만 따로 모아 쇠부리 작업에 썼다는 것. 한 술 더 얹어 땔감 얘기도 나왔다. 어릴 적 고향마을에서 눈여겨본 광경을 떠올리시는 것 같았다. “쇠 불리는 작업은 나무(땔감)가 많은 곳에서 했지. 숯은 참나무를 태운 백탄(白炭)을 썼고. 화력이 셌으니까.”

대화 도중 ‘B교수’(△△협회 명예이사장)이 한 말씀 거들었다. 몇 해 전 공장이 많은 창원에서 추진했다는 ‘신철기’ 관련 사업 얘기였다. 말 나오기가 무섭게 큰스님이 말문을 막았다. 철(鐵)에 관한 사업이라면 창원 대신 울산에서 해보라는 충고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창원이 울산만은 못하기 때문이야.”

큰스님의 울산 예찬론은 끝을 몰랐다. B교수가 언뜻 완도가 근거지였던 ‘해상왕 장보고’ 얘기를 꺼내자 이도 애써 말리셨다. 말씀 속에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장보고도 신라 사람이야. 신라 통일의 동력은 철기문화가 앞전 울산에서 나왔고. 정 뭣하면 울산에서 B교수를 초청하는 모양새로 사업을 하면 될 것 아니겠나?”

이번에는 필자가 말문을 열었다. ‘지론(持論)의 근거를 지난 시대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겠는지’라는 질문을 담았다. 답변이 돌아왔다. 기록에도 분명히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씀도 덧붙였다. “기록에 없다면 ‘모른다’ 해야겠지만 ‘아니라’는 기록은 또 어디 있나? 역사적 기록이 추측(추론, 가설)에서 비롯되는 것도 많지 않은가?” 어려서 귀동냥으로 들은 얘기, 출가 후 발품을 팔며 눈으로 확인한 사실(史實)들이 강한 자신감으로 굳어졌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큰스님의 이야기는 보좌스님이 ‘점심공양’ 시간을 알리면서 가까스로 멈추었다. 그 전까지의 얘기 속에는 신라 때의 고승(高僧) 자장율사와 그를 극진히 모시면서 조언까지 구했던 당태종 이세민 이야기 하며, 적잖은 이야기들이 실타래처럼 풀려 나왔다. 그중에는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엄청난 규모의 ‘양산 토성’ 일대가 골프장에 편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벌인 통도사 스님들의 집단저항 얘기도 포함돼 있었다.

어쨌거나, 성파 큰스님이 풀어나간 대화의 큰 줄기는 ‘울산에 대한 애착’이었다. 그의 ‘울산사랑’을 입증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야기 꾸러미는 다음 기회에 풀기로 한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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