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의의 표상 엄흥도, 울산이 품다
절의의 표상 엄흥도, 울산이 품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0.2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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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잘 알려진 왕방연의 시조이다. 어린 임금에게 사약을 내리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멈춰 서서 이처럼 읊은 것이다. 때는 1457년 10월 하순의 일이니 단종이 노산군으로 폐서인되어 영월로 유배 온 지 넉 달째 만이었다. ‘시신을 거두는 자 삼족을 멸하겠다’는 역률이 떨어진지라 겨우 17세 나이의 임금 시신은 서강의 강가에 버려져 있었다.

다행히도 이 시신을 거두는 이가 있었다. 그는 고을 아전의 수장으로서 차마 이 애처로운 임금의 시신을 외면할 수 없었다. “좋은 일 하고도 화를 당한다면 나는 달게 받겠다(爲善被禍 吾所甘心)”는 각오가 임금과의 충절을 지키게 한 것이다. 추상같은 어명도 두렵지 않았지만 그냥 앉아서 멸문을 당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시신을 수습하여 선산에 암장하고는 영월 땅을 떠나 몸을 숨겼다. 그가 행한 일은 자기 자신도 그렇지만 멸문을 감수한 의행이었다. 인간 최고의 휴머니티를 발현한 그는 바로 영월호장 엄흥도(1404-1474)였다.

엄흥도가 먼저 찾은 곳은 동학사였다. 그곳에서 김시습을 만나 단종의 승하 사실을 알리고, 그가 수습한 어의를 건네주면서 매월당과 함께 단을 만들어 재(齋)를 올리고는 남쪽으로 향했다. 남하하면서 한 아들은 청주에, 또 한 아들은 의흥(지금의 군위)에 두고, 자신은 큰아들만 데리고 한때 경주에 머무르게 된다. 그는 다시 발걸음을 언양 땅 작동으로 향했다. ‘영산신씨’들과의 오랜 세의로 인해 그곳에 은거했을 거라는 설이 있다. 후손들은 다시 울산 땅 온산 쪽으로 옮겨 그 일대에서 발복하였으니 세칭 ‘산성엄씨’라고 일컫는다.

200년 세월 동안 후손들은 숨죽이며 숨어 살았다. 현종 10년(1669)에 송시열이 경연에서 엄흥도의 후손 기용을 요청했고, 임금은 가납했다.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던 후손들은 조정의 움직임에 겁을 먹고 자신들의 조상을 드러내기는커녕 더욱 오지로 숨어들었다. 숙종 24년(1698)에는 단종으로 묘호를 정하고, 노산군 묘가 장릉으로 추봉되면서 엄흥도에게 공조좌랑으로 증직되었다. 엄흥도의 의행은 일찍이 중종 11년(1516)에 우승지 신상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고, 왕조실록에 기록되었지만 이렇듯 긴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엄흥도의 절의는 더욱 천고(千古)에 솟아올랐다. 조선 중기 이후 충효에 대한 재평가와 현창사업이 이어진 것이다. 영조 2년(1726)에 장릉 묘역에 엄공의 정려각이 하사되었고, 영조 26년에는 예천에 별묘가 건립되었으며, 영조 32년에는 문경에 상절사가 건립되었다. 영조 34년에는 영월 창절사에 사육신과 함께 배향되었는데, 임금이 직접 치제문을 내렸다. 정조 2년(1778)에는 공적으로 엄흥도의 후손임을 최초로 인정받고 충신 정려문이 내려졌다. 순조 33년(1833)에는 공조판서로 추증되었고, 고종 14년(1877)에는 시호(충의공, 忠毅公)가 내려졌다.

울산에 살던 엄씨들은 정조 12년(1788)에야 엄흥도의 후손임을 드러내었다. 정조 23년(1799) 원강사를 지어 충의공을 모셨고, 순조 17년(1817)에는 원강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충의공실기를 편찬하였다. 순조 20년(1820)에는 나라에서 묘정비를 내렸는데, 명칭은 <조선충신 영월호장 증 공조참판 엄공 원강서원비>이다. 홍문관제학 조진관이 글을 지었고, 동부승지 이익회가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당시 명필이었던 이조판서 이조원이 썼다. 임금이 하사한 이 비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울산광역시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엄흥도는 충절의 인물로 추앙할만하다. 나라에서 공조판서로 추증하고, 충의공이라는 시호까지 내렸다. 당대 최고의 인물들이 글을 짓고, 쓰게 하여 사액비도 내렸다. 여기에다가 ‘영월엄씨 울산문중’은 원강서원에 불천위 조상을 모시고 있다. 예천문중에서 먼저 불천위 칙지를 받았지만 울산문중에서 선대 조상의 묘지석을 증거로 제시하여 종통 시비를 종결하는 판결(1903)을 받은 것이다. 원강서원의 기문이나 묘정비, 이건 과정 등은 울주문화원이 발간한 <울주군 원사정재 삼동면 편, pp.16-52>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우리 증조모는 충의공의 후손이다. 증조모 산성할매는 지금도 기일과 명절 때 신위를 모신다. 1864년에 나시어 가마에 담뱃대를 넣어가지고 시집오셔서 7남매를 두셨다. 천석지기 친가에서 자랐고, 외가와 시가 모두 넉넉하였다. 손이 크고 기세가 대단했던 산성할매는 1951년 봄에 88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이런 연유로 나는 충의공 엄흥도의 외예손이다. 지난 16일(음 9.18)에 원강서원에 있었던 충의공 545주기 제례에 다녀왔다. 절개와 의리, 절의를 지킨 엄흥도를 품었던 울산 땅의 역사가 한결 그윽하게 느껴진 날이었다.

이정호 수필가·울산학포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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