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라는 소녀
‘써니’라는 소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0.21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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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쌓인 오솔길로 들어서니 도토리가 ‘툭’하며 떨어진다. 가을 정취에 빠진 것인가, 돌연 ‘써니’(Su nny)라는 이름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건, 동네 대로변의 대형 커피전문점에서 일하는 어느 바리스타 ‘소녀’ 이름이다. 여기에서 근무하는 바리스타들은 본명 대신 영어 닉네임을 따로 만들어 언제나 왼쪽가슴에 달고 일한다. 서양문물 중 가장 대표적인 표상이다. 그들 나름의 닉네임을 다는 것은 그 유명 브랜드 커피전문점의 방침이자 그들의 판매전략 중 하나일 테다. 이 소녀는, 유별나게 다른 이보다 밝은 성격이기도 하거니와 친절한 매너로 고객을 맞이한다. 검정 유니폼에 해군들이 쓰는 조그마한 베레모까지 눌러쓰고 있으니 더욱 귀엽다.

원래 ‘소녀’라는 뜻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여자나 나이 어린 여자아이를 일컫는다. 이 커피점의 소녀는 어쩐지 성숙한 여성으로의 감성이 물씬 난다. 10여년 전 에스엠 소속 8인조 걸그룹 ‘소녀시대’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갈 것 같다. ‘소녀시대’라는 이름은 ‘소녀들이 평정할 시대가 왔다’는 뜻이라 한다. 말 그대로 한 시대를 평온하게 진정시켰던 대단한 인기그룹이었다.

‘소녀’라는 말이 나왔으니 한 가지 더 보태고 싶다. 한때 풍미했던 애처롭고 슬프게 들리는 대중가요가 있었다. 서른세 살에 요절한 70년대 가수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다. 가사와 곡이 애절하기 그지없다. /버들잎 따다가 연못위에 띄워놓고/ 쓸쓸히 바라보는 이름 모를 ‘소녀’/ 밤은 깊어가고 산새들은 잠들어/ …[이름 모를 소녀]. 이때의 ‘소녀’ 역시 약간의 성숙미 있는 여성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커피전문점의 ‘소녀’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이름 ‘써니’는, 내가 대학생 때 좋아했던 팝송에서 진정한 함의를 찾아볼 수 있어서 즐겁다.

‘써니! 에스터데이 마이 라이프(Sunny, yesterday my life)…’로 시작되는 음악. 갑작스레 누군가를 애절하게 부르는 ‘외침’ 같은 것이리라. 바로 그 음악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써니’를 상상해보면 아마도 진의(眞意)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소울가수 보비 헵이 1965년에 작사, 작곡한 곡이다. 한번 그 가사의 의미를 곱씹어 보기로 하자.

/써니! 어제까지 내 인생은 온통 비에 젖은 시련이었어요./ 써니! 너의 미소는 정말 내 고통을 덜어주었지요./ 이젠 괴로운 날들은 끝나고 밝은 새날이 왔어요!/ 나의 태양 같은 당신은 너무나 순수하게 빛나고/ …[Sunny, Boney M]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암울한 분위기에 빠졌던 미국은, 이 음악의 출현으로 온 나라가 ‘희망찬 미래’의 서광이 보이기 시작했다. 덕택에 미래의 모든 것들에 대한 희망의 불씨 같은 긍정의 분위기로 감싸이기 시작했다. 아무튼 여유 없는 현대인의 생활, 쉼 없는 오늘의 우리 생활은 따분하다. 행복한 우리의 삶은 여유와 쉼, 즐거움과 긍정적 사고일 것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카페’라는 작은 쉼터 또한 훌륭한 휴식처가 되지 않을까? 이젠 생활 패턴이 바뀌어 도서관 같은 커피점으로 변모했다. 도시의 삶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 다니기 안락한 캐주얼 신발을 신고, 소프트한 백팩에 소지품을 넣고 떠나는 하루 일상의 힐링…. 왠지 온몸에서 엔돌핀 같은 몽롱한 전율이 사르르 밀려온다.

‘써니’를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연인, 한 그룹의 행복한 가정, 서로 돕고 사는 이웃 동네사람들로 생각해보자. 나아가서 한 나라의 애국심,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행복한 삶까지 생각할 수 있는 ‘신성한 말’로 남았으면 한다. 햇볕이 쨍쨍 내리쬔다는 밝고 맑은 호칭 ‘써니’. ‘써니’라고 부를 수 있는 희망찬 세상이 어서 도래했으면 한다. 우리 모두 걱정 없고 불안감 없는 미래에 살고 싶으니까.

김원호 울산대 인문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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