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의 붉은 호랑이들’에 대한 기억
‘일산의 붉은 호랑이들’에 대한 기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0.09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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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갈등으로 일제강점기에 대한 역사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부응해 지역의 숨겨진 항일역사를 재조명하고, 독립운동의 정신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울산시교육청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역의 항일 교육기관과 인사를 발굴해 기념하는 연간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울산 교육독립운동 100년의 빛’이라는 이름으로 6차례의 행사를 기획했고, 한글날에는 동구 보성학교 터에서 ‘일산의 붉은 호랑이들 보성학교’라는 주제로 다섯 번째 행사를 가졌다. 동구의 보성학교는 일제시기 우리말을 가르치는 등 민족교육의 요람이었지만 시민들에게는 다소 생소하다.

일제강점기에 식민어업기지로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방어진은 일본인 중심의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 당시 일제는 1910년대 우민화 정책(1차 조선교육령)으로 민족의식을 함양하는 사립학교 설립을 제한했다. 따라서 가난한 조선인 아이들은 교육기회에서 소외되거나 차별교육을 받았다.

성세빈 선생은 3·1운동의 열기로 고조된 실력양성운동에 힘입어 1920년 야학을 설립했다. 1922년에는 학교 터를 제공하고 지역유지들의 기부를 받아 교사를 신축해 보성학교를 개교했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는 교장을 역임하며 학교를 이끌었다. 당시 보성학교에 다녔던 김병희 어른의 회고에 따르면 성세빈은 한 행사에서 일본 경찰이 세 번이나 경고했지만 연설을 중단하지 않았을 정도로 강직한 성품을 가졌다고 한다.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서진문 선생과 이효정 선생 역시 보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지역의 항일의식 고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밖에도 보성학교 교원들은 1920년대 청년운동의 주요 간부진으로 활약하며 지역운동을 이끌었다. 학생들 역시 ‘적호소년단(赤虎 少年團)’에 가입해 문맹 퇴치와 항일의식 고취를 위한 선전활동을 펼쳤다. 이처럼 보성학교는 동구지역 항일 및 사회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다했다.

이러한 영향력 때문에 일제는 1929년 2월, 사립학교규칙 개정을 빌미로 학교를 폐쇄시켰으나 3월말 성세빈과 교원들이 학교를 떠남으로써 폐쇄는 막았다. 그밖에도 재정난으로 운영의 어려움이 많았으나 지역민들이 후원회를 조직하고 찬조금을 내서 학교를 지켜냈다.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와 탄압에도 보성학교의 민족정신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보성학교 학생들은 『국어독본』이라 쓰인 일본어 교과서 표지를 긁어내 ‘國(국)’자를 지우고 ‘日(일)’자를 써놓는 등 일본어를 국어로 인식하는 것을 거부했다. 1934년에는 항일 및 사회계급의식을 심어주는 수업을 했다고 교사가 검거된 사건도 있었다. 이와 같이 보성학교는 식민지시기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교육을 통해 민족의 자생력을 키우고 학생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보성학교는 울산의 중요한 항일운동의 터전이었지만 현재는 설립자 성세빈의 송덕비만 덩그러니 서 있다. 인근에 성세빈의 생가, 서진문의 묘역도 남아있지만 추모시설로 관리되지는 못하고 있다. 울산시교육청은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잊혀져가는 보성학교를 기리기 위해 성세빈 송덕비 앞에 QR코드 현판을 설치한다. 또 근처 중학교 학생 및 일제잔재청산 동아리 학생들과 보성학교 유적을 탐방하며 보성학교가 잉태했던 ‘붉은 호랑이들’에 대한 기억을 되새긴다. 관련 유적이 정비되고 보성학교 스토리텔링이 계발된다면 더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찾는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이 될 것이다.

아쉬우나마 동구청이 성세빈 생가 복원 계획을 세우고, 새로 지을 예정인 일산진마을 주민공동이용시설 안에 보성학교 관련 전시실을 마련한다고 한다. 보성학교가 지역사에서 갖는 의미가 결코 작지 않은다. 지역사회와 학계가 관심을 가지고 보성학교 알리기에 동참해주기를 기대한다.

배정윤 온산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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