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길목의 시골 살이 소묘
가을 길목의 시골 살이 소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0.07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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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한 마을의 산 그림자가 참 아름답다. 야트막한 야산들이 집 가까이에 있어서 아침녘에는 동쪽에서, 저녁답에는 서쪽에서 산 그림자들이 집 쪽으로 향한다. 특히 서쪽의 산 그림자는 오후 서너 시가 되면 키가 무척 크다. 매일 이 산 그림자들을 보면서 하루를 여닫지만 때로 산안개나 초승달도 바라보며 아슴푸레한 옛일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 하루하루 속의 삶에는 새로운 경험들이 쌓여간다. 부지런해야 한다는 명제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그래도 맞닥뜨리면서 해내야 하는 만큼 피하고 싶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가을 길목은 더위가 채 가시기 전부터 시작된다. 삐쭉삐쭉 달린 고추가 빨갛게 되면 가을 풍경이 연상된다. 텃밭에 심었던 쉰 여 포기의 고추 중 절반가량이나 달린 고추라는 게 아기들 손가락만 해서 병이 들었나 싶었다. 어느 날 찾아온 친구에게 이 고추는 무슨 병이 들었냐고 물었더니, 이게 땡초지 병은 무슨 병이냐고 해서 한참을 웃었다. 그래도 하나하나 따서 빨리 마르라고 가위로 쪼개서 정성껏 말렸다. 이 매운 걸 말려서 어디에 쓰겠냐고 하던 아내가 귀한 용도를 찾았다. 국밥집 하는 동생네는 이런 매운 고춧가루가 필수 양념이란다.

지난여름은 비가 자주 왔다. 이 잦은 비가 고추역병이라는 돌림병이 들게 해서 이웃들의 고추농사를 망쳐버렸다. 비가 잦으면 고추뿐만 아니라 어떤 작물이든 녹엽 생성이 부족하거나 열매 맺음이 부실하다. 다행히도 공을 들인 토마토는 한 달 반여 동안 아침마다 딸 게 나와서 매일 삶아서 주스를 만들어 먹었다. 호박이나 가지도 줄기차게 열려서 넉넉했지만 오이는 무슨 이유인지 한 달도 채 가지 못하고 생명을 다했다. 이런 열매채소들은 지주를 튼튼하게 세워줘야 하는데, 세울 때 못지않게 해체하는 데도 시간이 꽤나 걸렸다.

깨 농사를 처음 지었다. 넓지 않은 집안 텃밭에는 주로 채소만 가꾸지 다른 작물은 재배할 공간이 못된다. 고구마나 마늘, 양파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마침 담 너머에 있는 빈 땅이 있었는데 영농회장이 같이 농사짓기를 권하여 백여 평의 밭이 생겼다. 여기에다가 약간의 거름을 넣고 장만해두었다가 고구마와 땅콩, 참깨, 들깨를 차례대로 심었다. 씨앗이나 모종은 이웃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했는데, 어떤 것이든 심거나 뿌린다고 해서 그냥 되는 것이 아닌지 병과 벌레가 달려들어 애를 태웠다.

이 중에서 가장 먼저 수확한 것이 참깨다. 밭에 서 있을 때는 제법 많아보여도 막상 베서 단을 묶고 모아보니 많지 않았다. 아주 작은 글씨를 깨알 같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작디작은 알갱이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정성들여 말리고 털었다. 태풍도 두어 차례 다녀간지라 비를 피해 이리저리 옮겨가면서 말리는데 공이 여간 드는 게 아니었다. 지난해 가을에 이웃에서 빌려준 스무 평 남짓한 밭에 마늘과 양파를 심었었다. 그 자리에도 참깨 씨앗을 넣었더니 제법 잘 자라서 두 곳에서 서 되쯤의 수확을 했는데 느껴지는 무게만큼 마음도 흐뭇했다.

고구마는 손이 가장 덜 가는 작물이다. 고구마를 심고 물을 한 번 줬는데도 병도 나지 않으면서 잘 자라주었다. 고구마와 들깨는 잎줄기를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길게 뻗어나가는 고구마의 원줄기에 달린 잎줄기는 반찬 만드는 데 요긴하게 쓰인다. 데워서 생선찌개를 해서 먹었고, 김치를 담가서 먹기도 했다. 들깨는 거름이 좀 셌는지 세력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두 포기를 함께 심었던 곳은 한 포기를 통째로 잘라내었다. 깻잎은 물론 가지 번식을 위해 잘라낸 순도 몇 차례 따서 아내의 바느질 식구들과 정인 양 나누었다.

9월이 시작되던 날, 무와 배추 심을 준비를 했다. 숙성된 퇴비에다가 복합비료와 토양소독제까지 섞어서 골고루 뿌리고 삽질을 했다. 지난해에 거름이 약했던지 신통찮아서 올해에는 각별한 공을 들인 것이다. 다듬은 밭이랑이 짤막짤막하여 좀 그랬지만 배추 모종을 심고, 무씨를 뿌렸다. 모종이 자리 잡기도 전에 배추벌레가 달려들었다. 초기에는 약을 쳐야 한다는 권유를 듣지 않고 아내는 아침마다 벌레를 잡았지만 배추 이파리에는 구멍이 숭숭 뚫렸다. 올해도 크기가 들쑥날쑥하고, 태풍에 시달려서 별로지만 기대감을 저버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시골은 이제 본격적인 가을로 들어서고 있다. 부모님의 농사일을 보고 자랐지만 나는 농사일에 젬병이다. 시골학교 사택에 살면서 작물들을 가꿔본 경험들이 그나마 귀촌할 용기를 주었다. 가을의 중간을 지나기 전에 고구마며 땅콩, 들깨도 거둬야 하고, 마늘도 심어야 한다. 고롱고롱한 아내의 건강을 살피건대 이 정도의 농사도 고맙기만 하다. 시골에 산다고 해서 세상과 유리될 수 없고, 몸에 병 없고 마음에 근심 없기를 바랄 수는 더욱 없다. 시골에 살면서 지금과 같은 일상을 되풀이하고 싶다는 여망만이 있을 뿐이다.

이정호 수필가·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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