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스케치] 태화강 범람원을 가다
[현장 스케치] 태화강 범람원을 가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0.0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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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 국가정원 ‘느티마당’ 진입로 어귀. 나무그늘에 자리를 잡은 50대 초반의 주부가 바짝 당겨 앉은 남편에게 맑게 갠 서쪽 하늘을 가리키며 말한다. “여보, 저 하늘, 진짜 이쁘지? 파란 게 꼭 그림 같잖아.” 또래로 보이는 남편이 아내의 말을 우스개로 받는다. “멍이 들어서 그렇잖아.”

3일 오전 11시 30분이면, 대밭 쪽 오르막 입구가 진흙범벅인 ‘십리대밭교’를 간신히 건너 그보다 훨씬 더 질펀한 국가정원 구석구석을 탐사하듯 누빈 지 2시간이 조금 넘은 시각. 모처럼 맞이한 화창한 가을 날씨가 손짓한 탓일까, 삼삼오오 떼 지어 나들이 나온 시민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다. 50대 부부의 살가운 대화를 뒤로하고 빈 택시라도 있나 두리번거리며 국가정원을 나섰다.

작심하고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긴 했지만 아마추어 티를 벗자면 아직도 한참 멀어서 그런가. 운동화, 무르팍에다 상의까지 온통 진흙투성이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안경과 모자를 일부러 꺼내 신분을 감추어도 보지만 주위의 시선은 여전히 따갑게만 느껴진다.

태화강 국가정원을 일전에 찾은 것이 17호 태풍 ‘타파’가 지나간 직후였으니 다시 찾은 건 근 열흘 만이다. 18호 태풍 ‘미탁’의 위력을 가늠해볼 요량이었다. 이 녀석이 울산시민의 새로운 보금자리 ‘제2호 국가정원’에 무슨 못된 짓이라도 저질러 놓았을까 하는 것이 1순위 관심사. ‘오산못’과 ‘여울다리’를 잇는 약 1.1km 길이 샛강의 남쪽을 주된 목표지로 잡았으니 탐사 코스는 열흘 전과는 전혀 딴판, 역방향인 셈이다.

현장은 한마디로 ‘포성이 멎은 전장’ 아니면 ‘야전병원’ 같았다. 짬짬이 사진 기록도 해두었지만, 지대가 비교적 낮은 ‘태화강대공원 편의점’ 주변은 그야말로 누런 황토길 일색. ‘해파랑길’의 한 자락인 여울다리 난간도 그랬지만, 곳곳에 손품을 기다리는 태풍피해의 잔해들은 미탁이 호위병처럼 데리고 온 ‘태화강 홍수주의보’의 만행을 한눈에 입증하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필시 샛강 상류 쪽에서 떠내려 왔을 짚단 같은 풀대와 나뭇가지 더미, 그리고 정위치를 이탈한 대나무울타리의 뼈대들은 국가정원 관계자들에게 무슨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던 것일까?

태풍 미탁이 부린 심술의 흔적은 물살이 거친 샛강과 그 주변에서 가장 또렷하게 부각되고 있었다. 샛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주요 길목마다 둘러쳐진 노란 ‘금줄’들…. 느티마당이나 공사를 하다 만 ‘태화강 수생식물정원’으로 쉬 들어가지 못하게 원천봉쇄 시위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방향을 틀어 들여다 본 곳이 식물터널과 바로 이웃한 국화정원. 그런데 이게 웬…? 새끼손가락만한 동남참게 한 마리가 여차하면 대들 태세로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게 아닌가.

문젯거리는 그 다음번 시야에 잡혔다. 꽃망울도 설 영근 것 같은 국화들이 누렇게 마른 식물줄기와 가벼운 입간판의 무게에 마구 짓눌리고 있었던 것. 환경정비의 손길이 여기도 필요하겠네 하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 평상복 차림의 젊은이가 갑자기 소리의 톤을 높였다. “어르신, 복구하는 중이니 사진 찍지 마세요.” 물어보니 ‘정원관리단’ 소속이라 했다.

샛강을 건너는 모험은 피하는 게 상책이란 결론을 내렸다. 샛강 북쪽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은 딱 두 갈래. 서쪽 오산못이나 동쪽 대밭으로 둘러가는 길이 그것이었다. 망설인 끝에 후자를 낙점했다. 동쪽 가장자리 대밭도 불어난 빗물이 마구잡이로 휩쓸고 지나갔는지 생채가 의외로 뚜렷했다. 뒤집힌 채 드러누운 벤치에다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진 잡동사니들까지 뒤섞인 모습….

느티마당을 지나 향한 곳은 누런 물빛이 황하를 연상시키는 샛강 언저리. 물속에 풀더미를 한가득 뒤집어쓴 네댓 시설물들의 정체를 파악하고 싶어서였다. 유일한 실수가 여기서 벌어졌다. 사진을 좋은 각도에서 찍겠답시고 경사진 강변으로 발을 내디뎠다가 그만 보기 좋게 미끄러지고 만 것. ‘노란 금줄’의 메시지를 무시한 게 화근이었다. 자세히 보니 햇살을 막아주는 가리개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 아래 징검다리라도 있었을 텐데…. 샛강 물이 어느 정도 넘쳐흘렀는지 눈대중만으로도 가늠할 수 있었다.

홍수의 위력은 어림잡기가 어렵지 않았다. 사람 키보다 높은 차양시설의 꼭대기까지 쓰레기더미가 걸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샛강을 둘러오기 전 국화정원의 대나무울타리 높이와 그 속 국화 높이를 휴대용 줄자로 재 보았더니 50~60cm는 거뜬히 넘어서 있었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울산시 정원관리단이 ‘타파’와 ‘미탁’이 차례로 건네준 교훈을 태화강 국가정원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는다면…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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